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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제 Oct 05. 2020

응답하지 않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도 재능일 테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0화 리뷰

1. 오늘 글을 쓰게 만든 단 하나의 장면. 대학원 입시곡 연습을 끝내고 지친 채 연습실에 있던 송아는 학생들이 웅성거리자 그곳으로 걸어간다. 준영과 정경이 연습하고 있다. "월드클래스는 역시 다르네." 흔한 칭찬이 여기저기서 쏟아지지만 송아에게 들리지 않는다. 연주에 집중한 준영과 정경이 있을 뿐이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어우러져 내는 선율은 곧 침묵으로 이어진다. 준영을 좋아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따금 발목을 잡은 두 가지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든다.


준영과 정경이 쌓아 올린 15년의 시간에 내가 들어갈 틈이 있을까. 그리고 바이올린을 짝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시작해 석사 진학을 앞두고 있는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되지 않는 그 재능의 벽을 어떻게 넘어야 할까.


입시곡을 연주하는 송아의 표정엔 확신 대신 '머뭇거림'이 있다. 피아노 반주자도 거듭 지적한다. "송아씨가 생각했던 템포가 있을 거잖아요." 혼자 연주할 땐 괜찮은데 왜 자꾸 피아노에 맞춰주냐고. 대조적으로 정경의 얼굴엔 마스터 클래스 때 얘기했던 '확신'이 분명 존재한다. 정경 본인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 방법을 찾게 되면 알려달라 했지만 주저함이 없다. 바이올린 앞에 늘 조심스러운 송아와는 다르다.


짝사랑이라 그럴 테다. 너무 좋아하니까. 그러면 우린 늘 그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 당신이 행여나 도망갈까 두려우니까. 너무 잘하고 싶어 한음씩 짚어나가는 손길마저 얼음연못을 걷는 마음일 테니.


그래송아가 너무 작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확신'을 찾아나가길 기다린다. 응답하지 않는 상대방을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마저도 재능이니까.



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결국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애매한 재능, 혹은 재능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송아와 더불어 이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유태진 교수.


바이올린을 향한 송아의 마음이 '사랑'이라면, 유태진 교수의 피아노를 향한 마음은 '열등감'이 아닐까. 천재의 반열에 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의.


서령대 출신도 아니고 유명한 연주자도 아니었던 본인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자괴감을 느꼈을 것 같다. 절대 노력해도 갖지 못한 천재성을 너무 갈망하는 사람. 박준영이라는 훌륭한 제자를 길러낸 것만으로는 충족이 안돼서, 쇼팽 콩쿠르 '1위 없는 2위'로만은 만족이 안되기에 계속 준영을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한계 짓고. "넌 나 없으면 안 돼." 그렇게라도 존재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그러진 마음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처음엔 그저 제자를 이용하려는 탐욕스러운 교수라고만 여겼으나 9화에 드러난 그와 준영의 이야기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두 사람은 분명 다르다. 준영도 말한 것처럼 아예 결이 다른 사람이다. 준영은 경쟁심보다 계속 피아노를 칠 수 있느냐, 그걸로 부모를 부양할 수 있느냐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 승지민이 쇼팽 콩쿠르 1위를 했을 때도 열등감은 갖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거냐 되묻는다. 반면, 유태진은 누군가 자신을 앞서갈 때 이 악물고 다시 역전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승지민이 쇼팽 콩쿠르 1위를 거머쥐었을 때 혹시 준영이 속상하지나 않았을까보다 '쇼팽 콩쿠르 1위 제자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을 가져갈 누군가를 질투하고 분노했을게 분명하다. 유태진은 나보다 나은 천재가 잘 안풀리고 어딘가 잘못되길 바라는 게 평범한 마음이라 생각하니까.


그런데 천재성에 대한 결핍과 강박이 박준영을 만나게 해 준 것일 테니 너무 그 속에 갇혀있지 않았으면 한다. 여름에 발매한 앨범에 누군가 남긴 "Every good teacher is not a good performer."란 평에 너무 상처 받지 말기를. 최소한 당신은 good teacher이긴 한 거니까. 그리고 당신의 열등감을 직면한다면 스스로에게도, 준영에게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



3. 잠시 취미로 소설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글을 쓴 적이 있다. 댓글이 적게 달린 날은 속상해하고 매일 비슷한 단어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답답했다. 책장에 있는 아무 소설이나 집어 펼치면 수려하고 유려한 문장이 두 눈에 가득 담기는데, 내가 써보라면 그러지 못할 것만 같아서. 창작하는 일을 갈망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감정이란 것도 안다.


대신 너무 깊이 앓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가 읽고 나를 떠올렸다는 문장을 되새기면서.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내게는 있다. 사랑은 아무래도 나의 천성이니 그것이 고갈될까 걱정하지는 않겠습니다.

                                                                                                  - 황정은 <디디의 우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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