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러닝화는 “할인”으로 샀다

보스턴12

by 박희진

가민 포러너 55를 손목에 채운 다음날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바빠졌다. 도망치지 않으려고 시계를 샀는데, 시계를 샀으니 이제는 또 “그럴듯한 러닝”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사람은 원래 하나를 붙잡으면 다음 핑계를 찾는다. 나는 그 핑계를 신발에서 찾았다.


SSG몰에서 보스턴12가 할인 중이었다. 9만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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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12 서울마라톤 에디션/무릎 아파서 기어온날


그 숫자가 내 머리를 설득했다. 러닝화를 제대로 사본 적이 없던 나에게 9만원대는 “합리적”처럼 보였다. 비싼 신발은 아직 내 영역이 아닌 것 같았고, 싸게 시작하면 부담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다.


박스가 도착했을 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새 신발 특유의 냄새, 바닥의 반듯한 모양, 끈을 묶는 손끝의 감각. 나는 그 순간에 잠깐 “이제 나는 러너” 같은 착각을 했다. 착각은 빠르고 달콤해서 위험하다.


첫 착화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손목엔 가민, 발엔 보스턴12.


전날의 똥신이 “생존”이었다면, 오늘의 보스턴12는 “변신” 같은 느낌이었다. 달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고 싶었다.


그런데 몇 걸음 뛰자마자, 몸이 말을 걸어왔다.


정확히는 무릎이 먼저 말했다.


무릎이 휙휙 도는 느낌이 들었다.


발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쪽으로 말리면서 돌아가는 느낌이 났다. 땅을 딛는 순간마다 아래에서 비틀리는 감각이 올라왔다. “힘들다”가 아니라, “정렬이 무너진다”에 가까웠다.


나는 강직성 평발이고 체중이 102kg이다.


그 사실을 ‘정보’로는 알고 있었지만, 달리기에서는 그게 ‘감각’으로 온다. 달리는 순간, 숨기던 것들이 바로 드러난다. 몸이 나를 속여주지 않는다.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평발이면 러닝화를 고를 때 “안정성”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나는 그냥 쿠션이 좋으면 되는 줄 알았고, 가벼우면 좋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할인”이 정답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보스턴12는 내게 첫 러닝화이자, 첫 교훈이 됐다.


러닝은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몸이 결론을 내린다는 것.


그리고 내 몸은 그날 아주 단호했다.


“이건 아니다.”


그 문장이 싫었는데, 동시에 고마웠다.


이제 나는 “세게 버티는 법”이 아니라 “맞게 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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