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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Mar 13. 2024

어머니와 삼겹살

주말 아침 남편이 시댁행을 제안한다. 며칠 전부터 손자에게 밥을 사주고 싶다고 하시던 시어머니가 어제는 삼겹살 세근을 사다 놨다고 전화를 하셨다는 것이다. 집안 청소를 대충 마치고 오전 11시가 넘어 온 가족이 집을 나선다. 고기는 준비되어 있으니 추가로 필요한 건 야채류. 동네 마트에 들러 간단하게 장을 보고 어머니댁으로 향한다. 비 예보가 있는지 차창 밖 시야가 흐리고 하늘빛도 어슴푸레하다. 15분쯤 걸려 도착한 시골마을 어귀. 매년 인구가 줄고 있는 마을이 오늘따라 유난히 고즈넉하다.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담아내며 삐그덕 소리를 내는 철제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문을 열고 나오시는 그림자가 비친다. 보고 싶다던 손자가 들어서자 봄날 햇살처럼 금세 가라앉던 목소리 톤이 가늘고 높아진다. 쌀쌀한 날씨 탓에 종일 보일러를 가동해도 고령의 노인 혼자 채우고 있는 공간은 살짝 냉기가 떠다니고 있다. 습관처럼 인사를 건네고 들어서자마자 바로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고기 굽기에 진심인 남편은 김치냉장고에서 잘 숙성된 삼겹살을 꺼내 굽고 나는 상추를 씻고 파채를 무치고 금세 밥상을 차려낸다.


거실에 동그란 두레상을 펴놓고 모처럼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함께 점심을 먹는다. 새콤하게 무쳐낸 파채, 겨울바람을 이겨내 향긋함이 물씬 느껴지는 냉이무침, 바싹하게 구운 삼겹살이 식욕을 한껏 돋운다. 고기를 굽느라 편안하게 밥을 먹지 못하는 아들이 마음에 걸리는지 어머니 시선은 자꾸 주방으로 향한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남편에게 고기쌈을 갖다 주는 모습에 안도하며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홀로 드시는 식사에 대충 끼니를 때웠을 어머니도 모처럼 오래도록 젓가락질을 이어간다.


"고기를 사다 줬는데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다"거나 "어제 파마하러 나갔다가 고기를 사 왔다"는 전화는 보고 싶다는 마음을 에둘러 전하는 그녀만의 표현 방식이다. 딸들이 먹으라고 사다 주는 과일이나 견과류도 늘 많다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전화를 걸기도 한다. 혼자 소량씩 구워 드셔도 될 텐데 손자가 보고 싶다거나 밥을 사주고 싶은데 시간이 있는지 묻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어머니 고단수시네"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알기에 이내 자식들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 그동안 여러 번의 고비를 넘기셨다. 어르신들의 고질병인 고관절 수술을 두 번이나 하셨고 작년에도 고관절에 실금이 가서 병원 신세를 졌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효심 가득한 자녀들의 마음씀씀이 덕분에 잘 이겨내셨다. 항상 치매를 걱정하시지만 고령에도 기억력과 총기는 젊은 사람 못지않으시다. 그 비결은 지속적인 신체활동과 종교생활을 비롯해 몸에 밴 건강한 식습관 덕분이 아닐까 싶다. 평소에 음식은 싱겁게 천천히 오래 씹고 야채와 과일을 즐겨 드신다. 동료나 지인들의 부모님이 치매에 걸리거나 긴 병고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이 또한 다행스럽고 앞으로도 내내 건강하게 곁에 머물러주시길 바랄 뿐이다. 


준비한 야채와 어머니가 준비한 삼겹살을 깔끔하게 다 먹고 나서야 점심식사가 마무리되었다. 배가 부르니 몸이 노곤해지고 뜨듯하게 데워진 돌침대에 누우니 금세 잠이 쏟아진다. 급하게 갈 곳도 특별히 해야 할 일도 없으니 편안하게 누워 오랜만에 낮잠을 청한다. 모처럼 평온한 주말이다. 무탈한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도란도란 밥을 먹고 웃으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시간.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부러워하며 산다. 내가 가진 장점에 만족하기보다 부족한 단점들이 항상 크게 느껴져 불만스러운 날이 많다 누군가의 성공은 쉽게 이뤄졌다고 믿고 싶어 하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오랜 노력을 간과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부정한 적도 있다. 크든 작든 누군가의 성공이나 결실은 그 또는 그녀의 꾸준함과 성실의 성과이다. 누군가를 늘 부러워하기만 하고 머물러버리면 정말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부러워하는 시간은 아주 잠시면 된다. 그의 노력은 진심으로 칭찬하고 충분히 인정해 주고 나의 모습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내 장점을 키우며 나만의 길을 꾸준히 걸으면 된다. 


늘 부족하고 잘 살펴드리지도 못하지만 잘 내색하시지 않는 것이 더 죄송스럽다. 그렇다고 나 또한 많이 미안해하거나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그녀는 늘 내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항상 고맙다고 최고라고 추켜세워주는 그녀의 말에는 계면쩍어 "사회성이 좋으시네"라고 얼버무리고 만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며느리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주시려고 아이들이 아플 때는 당신이 데리고 주무셨고 유난히도 이뻐라 하셨다. 사랑이 많고 정이 넘쳐서 본인보다 자식들을 최우선으로 여기시는 따듯한 성정. 가끔 까다롭기도 하고 생각도 말도 많으셔서 귀가 살짝 아픈 날도 있지만 그 또한 애정을 표현하는 그녀만의 방식이라고 여긴다.


손님처럼 두어 시간을 머물고 집을 나선다.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을 읽지만 모른 척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올라탄다. 걸음이 불편하니 나오시지 말라는 말에도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오래도록 손을 흔드는 그녀.  추우니 빨리 들어가라는 당부에도 아들의 차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꾸부정한 고목처럼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 마음이 눅눅해진다. 다음에는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하실지 벌써 궁금해져 살짝 미소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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