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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Mar 28. 2024

추억과 기억사이

"그때 삼성출판사 전집 샀었잖아 너한테"

"야~ 나도 샀었잖아"

적당하게 나이 든 50대 중년들이 마주 앉아 오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는다. 이전에 한 번쯤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들도 있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은 일들도 있다. 그때 그랬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 벌써 30여 년이 더 지났는데 저렇게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친구들의 기억력이 신기할 따름이다. 근처에 있는 대학 구내식당에 가서 공짜밥을 먹었던 일부터 학과에서 장기자랑을 할 때 누가 1,2번이었고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심지어 1번부터 40번까지 학번 순서를 줄줄 읊어대는 친구도 있다. 간신히 본인 학번을 기억해 내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최근 들어 우연히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 친구들 모임이 주말마다 연이어 이뤄졌다.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친구들로 구성된 중학교 모임에서는 2박 3일 여행을 다녀왔고 남녀공학 고등학교는 늦었지만 처음 결성된 동창회 모임을 가졌다. 대학 동기들과의 만남은 입학 3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무려 6년 만에 이뤄져서 더 감회가 남달랐다. 주말마다 약속이 있다며 나가는 모습에 가족들은 입을 모았다. "유치원을 안 나와서 다행이네"라거나 "인싸로 살기도 참 어렵겠다"라면서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매월 급여 통장에서는 10여 건 이상의 모임 회비가 자동이체 된다. 직장 동기들 모임부터 학교 동문, 같이 근무했던 절친들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당연하게 여기던 모임들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체력에 딸리기도 하고 때론 불편한 자리도 생긴다. 이제 슬슬 정리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구나 싶지만 그 또한 마음만 앞설 뿐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최근에 모임 한 개가 더 늘어났다. 마음이 약해서 쉽게 거절하지 못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러다 보니 임원을 맡고 있는 곳과 통장까지 관리하는 모임도 여럿이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면 때론 매정하게 끊어내는 단호함이 부족한 탓이다. 


대학 동기 모임 장소는 오는 3월 말이면 1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지는 모교 근처 호텔. 행사를 기념하는 현수막이 홀 전면에 걸려있고 테이블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행사 일정표가 가지런히 누워있다. 매번 행사를 주선하는 친구가 손을 흔들며 제일 먼저 반긴다. 늘 유쾌함이 넘친다.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모습이다. 시골 출신이라고 주눅 드는 법도 없고 눈치를 보며 멈칫거리지도 않는다. 시원시원한 글쓰기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세심한 필체로 문학을 비롯해 철학, 정치까지 두루두루 지식을 전해주는 작가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평생 한 권도 내기 어려운 책을 벌써 13권이나 출간했다. 


약속시간 즈음해 하나 둘 친구들이 들어서고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의 만남에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끌어안기도 하고 예전 모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악수를 나눈다. 나 또한 정말 그대로네 라거나 늙지도 않는다거나 말을 건네며 오래전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살이 좀 올라 통통해지기도 하고 여전히 늘씬한 모습 그대로인 친구도 있다. 얼굴에는 세월을 느끼기에 충분할정도로 주름살이 제법 많지만 여전히 그녀와 그들은 36년 전 신입생시절 푸릇했던 친구들로 각인되어 있다. 


추억을 자꾸 더듬거나 떠올린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징조라고 한다. 10대는 물론 20~30대까지만 해도 이미 살짝 색이 바랜 기억들을 떠올릴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냥 그날 주어진 시간과 순간들을 살아내기에도 버겁고 다양한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에도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채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가슴이 헛헛한 순간이 찾아온다. 한동안 동창생 찾기 열풍이 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누군가는 조금 더 빠르고 더딜 뿐.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친구가 보고 싶어 수소문하기도 하고 어색함을 가득 안고 망설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기도 하는 것이다. 만나고 나서 간혹 후회하는 일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일단 만나고 나면 반가움이 먼저 달려 나간다.


오늘의 가장 큰 이벤트는 기념 촬영이다. 일단 단체로 모여서 한컷을 찍고 3~4명씩 어우러져 추억을 남긴다. 폼이 어정쩡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즐거운 기억들로 갈무리된다.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은 바로 오늘이다. 혹자는 나이가 들면서 사진 찍는 것을 피하기도 하지만  얼굴 구석구석 주름살이 깊어지는 것  또한 자연의 섭리이고 스스로 받아들여야 할 삶의 흔적이다. 또 이렇게 각자 삶터로 돌아가 분주하게 살다가 어느 날 이 사진을 보면서 추억과 기억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은근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친구들의 기막힌 기억력 덕분에 많은 추억의 탑을 다시 쌓는 날. 기억이 안 나 연신 고개를 갸우뚱한 시간이 많지만 적당한 망각 또한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매일매일 기억할 일들이 넘쳐나는 시간 속을 살고 있는 탓이다. 적당히 잊고 대강 기억하고 그 또한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배려라고 여긴다.


이제 100여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진다는 호텔 한 공간에서 새로운 추억을 갈무리할 때쯤 함께 한 친구들의 얼굴도 오래전 막걸리 동산에서 어울렸던 그날처럼 제법 발 그래진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준 그대들에게 따듯한 경의를 보내는 밤. 전국 각지에서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품고 만났던 그 인연의 가닥들을 포근하게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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