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 곳에서 거의 20년을 살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지역에 아파트가 신축되었지만 그때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미루어온 탓이다. 2년 전 추레해진 집 내부 리모델링을 여러 차례 고민한 적이 있다. 이사보다는 비용이 저렴하다고 판단했지만 한창 공사단가가 오르던 시기여서 견적이 제법 많이 나왔다. 도배, 장판을 비롯해 새시 교체까지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견적서를 본 가족들은 한결같이 큰돈을 들여도 별로 표시도 안 날 거 같다고 말했다. 비용대비 가성비가 없다는 말에 나 또한 주춤했다. 마침 지역에 신규아파트 분양이 끝난 지 두어 달 지난 즈음이었고, 이사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남편에게 슬쩍 의중을 물었더니 현재 살고 있는 집의 장점을 술술 풀어내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으로 대략 계산기를 두드려 본 후 남편에게 모델하우스 구경을 제안했고, 그렇게 우리는 불시로 이사를 결정했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드디어 입주일이 도래했고 덕분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유는 20여 년 동안 집안 곳곳에 자리 잡은 묵은 짐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이사할 때 쓰레기를 몇 트럭을 버렸다는 지인들의 경험담을 떠올리며 집안 곳곳을 대상으로 탐색전에 돌입했다. 나의 작전은 시간 날 때마다 구역을 정해 한 구역씩 정리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안방에 있는 붙박이장에 도전했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꺼낸 기억이 없는 바지를 비롯해 혹시나 하는 미련 때문에 몇 년 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옷가지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다음 정리 대상은 거실에 있는 붙박이 창고였다. 평소 자주 열어본 적도 없는 이곳에는 행사 때마다 받아온 수건들과 텀블러, 담요 등 기념품들이 수두룩했다. 한동안 원피스에 꽂혀서 구입했던 색색의 원피스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문제는 차곡차곡 정리해도 공간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선택한 방법은 나눔과 버리기였다. 주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파트 홍보용으로 받아온 노란색과 분홍색 행주 수십 장을 비롯해 일회용 숟가락과 젓가락, 주방용품들이 서랍마다 가득했다. 오래된 물건과 개수가 여러 개인 물건들은 미련 없이 버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가장 곤혹스러웠던 정리 품목은 책이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책들은 책장 칸마다 이중으로 꽂혀있었는데 정확하게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대략 1000여 권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시집, 소설, 산문과 문학단체에서 받아온 계간지와 지인들의 시집, 수필집들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결국 식구들의 결사반대로 그중 일부만 갖고 가는 것으로 합의했고, 시집처럼 얇은 책과 산문집 중 애착이 가는 것들만 최소한으로 골라내는 작업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언제 다시 읽을지 기약할 수 없는 대부분의 책들은 시골집에 옮겨 놓는 것으로 정리는 일단락되었다.
한때 미니멀리즘이 유행한 적 있었다. 그들의 강조하는 공통사항은 물욕을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대한 미련도 없다. '언젠가 입겠지' 하는 맘으로 주저하지도 않을뿐더러 버리기에도 진심이다. 반면에 나는 어떤가. 서랍과 옷장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의 양을 보고 놀랄 정도다. 언젠가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몇 년째 제자리를 지키는 옷가지들을 비롯해 이런 것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선 물건도 상당하다. 가장 서프라이즈는 똑같은 디자인의 옷들이다. 한 번에 여러 장을 구입한 것도 아니고 햇수를 넘겨 구매했을 텐데 신기할 뿐이다. 정리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봤을 때 설레지 않는 물건, 1~2년 이내에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은 무조건 버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의 버리기 현주소는 아직 초보단계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례로 최근에도 일 년에 한두 번도 신지 않는 하이힐을 버리고 며칠 동안 아까워했을 뿐 아니라 버리려고 들고 갔던 바지를 도로 들고 온 날도 있을 정도로 미련과 물욕이 많다. 문제는 가끔 버리면 안 되는 필요한 물건을 버리기까지 해서 가족들의 원성을 듣기도 한다는 것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는 시를 남긴 박경리 시인의 말처럼 어차피 10원짜리 동전 한 개 갖고 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을 떠올린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왜 그리 실천이 어려울까. 물건보다 기억에 투자하라고 했던가. 사고 나면 금세 후회하고 말 물건들을 사 모으는데 정성을 들이지 말고 이제 나를 위한 따듯한 기억들을 늘려가는데 공을 들여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