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천국

by 정은숙

모처럼 일정이 없는 일요일, 한없이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마음과 달리 일찍 눈이 떠진다. 다시 잠을 청하고 휴대전화로 sns를 뒤적거리다 결국 8시가 채 못돼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가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음을 체감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오래간만에 등산이라도 나서볼까 하다 냉장고문을 연다. 주중에 거의 밥을 한 기억이 없으니 특별히 먹을 것도 재료도 없이 텅 빈 공간이다. 계란과 김밥용 김을 있으니 그럼 김치김밥을 말아볼까 하는 생각에 몸이 부산해진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계란 지단을 부친다. 오랜만에 묵은지가 들어있는 김치통을 열어 알맞게 익은 김치도 한 포기 꺼내 밑동을 자른 후 국물을 짜고 들기름과 깨를 넣어 조물조물 무친다. 이제 밥만 뜸이 들면 준비 완료. 김밥을 싸는 걸 눈치챈 남편이 청양고추를 넣어달라며 고추 서너 개를 잘라 지단 옆에 밀어 놓는다. 엉성하지만 스피드 하게 김치김밥이 마무리되어 갈 무렵 아직도 한밤중인 아이들을 깨우고 네 식구가 모처럼 식탁에 둘러앉는다.


김밥 하나를 입에 넣은 아들이 "아, 행복하다."라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이유를 물으니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김치김밥을 먹는 것이 첫째요,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내 엄마도 그렇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나도 그렇다'고 답변하고 커다란 김밥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남편은 매운 청양고추가 들어있는 김밥을 골라 먹고, 아이들은 입맛에 맞는 소스에 김밥을 찍어 배가 고프지 않다면서도 맛있게 먹는다. 덩달아 나도 다이어트를 해야겠다는 맘을 언제 먹었나 싶게 젓가락질을 이어간다.


사실 정말 얼마 만에 누리는 여유로움인가. 잇달아 비상근무를 했고 지난 주말에도 이런저런 행사들로 게으름 피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일정이 빡빡했다. 평일도 새벽 출근이 많았고 결국 지난 주말에는 정신이 몽롱하고 두통까지 생겨 고생했다. 단순 두통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감기를 동반한 몸살이라는 것도 하루가 지나서야 알았다. 나 자신에게 너무 무딘 건지, 아니면 힘들다는 것의 의미조차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무던함이 분명하다.


식사를 마치고 모처럼 식탁에서 시 한 편을 필사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이 또한 거의 한 달여 만이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제대로 된 독서를 한지가 언제인가 까마득하고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산문 한편을 제대로 써 본 날이 언제였던가. 이제 남보다 나를 더 살피고 남의 눈치 보다 내 눈치를 더 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내가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들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할 때 가슴 설레고 환해지는지. 타인들의 표정보다 나를 위해 늘 염려하고 배려하는 가족들의 안색을 더 살필 일이다. 늘 일이 우선이라는 핑계로 집안일은 뒷전이고 그나마도 남은 시간은 나를 위해 써버리는 이기적인 사람, 그것이 바로 나의 본모습임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김밥으로 아침 요기를 한 가족들이 제각각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새벽부터 일어나 운동을 하고 청소를 마친 남편은 소파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자고, 휴일이 못내 아쉬워 토요일밤 산책 나가 좋아하는 인형 뽑기로 스트레스를 풀고 들어온 아들은 게임을 한다. 또 다른 분신은 아마 지금도 다시 수면 중일 것이다. 어제는 모처럼 신간 소설 두 권을 주문했다. 후배가 요즘 인기가 많다며 내용이 궁금하다고 말했던 소설 한 권과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읽고 있는 인문학책을 주말 동안 부지런히 읽고 내일부터는 오래간만에 소설에 몰입할 생각을 하니 벌써 행복해진다. 아들은 김밥에서 천국을 만나고 그 여유로움 속에서 더불어 행복을 맛보는 휴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