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좀 주고 싶은데......"
얼마 전 마을에서 만난 낯익은 할머니가 두 손을 맞잡으며 물으신다. 으레 하시는 말이려니 여기며 평소처럼 반갑게 인사드린다. 내가 근무하는 면 지역은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48퍼센트 이상이다. 식당이나 마을에서 만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노인 인 셈인데 난 특히 할머니 팬이 많다. 이유는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시골은 마을회관에 가면 남녀가 따로 공간을 쓸 정도로 여전히 남녀가 유별하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들은 남자보다는 여자가 편하게 여기 신듯하다.
사업 공청회가 있는 날, 그 할머니를 또 만났다. 웃으며 인사드렸더니 "미나리 가져왔어요"라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 지퍼를 연다. 배가 불룩한 검정 비닐봉지가 쑥 빠져나온다. "미나리가 깨끗해요"라며 봉지를 내 손에 건네주시며 환하게 웃으신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장님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으냐"며 " 더 좋아라 하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진다.
엄마는 내가 면 지역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어른들에게 유난히 친화력이 좋던 동료직원 얘기를 하며 염려하셨다. 엄마가 아는 딸은 그다지 친화력이 좋지도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 일터였다. 엄마 걱정 덕분이었는지 난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던 많은 측은지심이 숨어있었고 엄마를 닮아 부지런한 성정은 나도 주체 못 할 정도로 현장을 뛰어다니게 만들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은 우비와 장화가 필수템이 되었고, 바쁘게 움직이는 만큼 보람된 순간들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힘들 때마다 곁에서 응원해 주고 도와주는 분들도 많아졌다. 팬클럽을 자처하는 사람도 생겼다.
할머니가 주신 검정봉지에는 깔끔하게 다듬은 내 손바닥길이만 한 미나리 한 움큼과 봄동 서너 포기가 들어있었다. 퇴근하자마자 압력솥에 쌀을 안치고 우삼겹 곱창전골이 끓는 동안 미나리를 살짝 데쳤다. 찬물에 헹궈낸 미나리는 소금과 들기름을 넣어 삼삼하게 무치고, 봄동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겉절이로 버무렸다.
"벌써 미나리가 나오나", "봄동도 맛있네" 배가 고프다며 먼저 나물 맛을 보던 남편이 젓가락질을 이어간다. 나도 연한 미나리무침과 봄동 겉절이 덕분에 입안에 향긋한 봄기운이 스르르 퍼진다.
겨우내 메말랐던 초목들에게 이제 봄이라고 재촉하듯 봄비가 내리는 밤. 나눠주고 싶은 마음에 미나리를 채취하고 줄기를 다듬다가 텃밭에 심어둔 봄동 몇 포기를 챙겨 넣었을 할머니의 따듯한 마음과 손길이 떠올라 가슴 가득 온기가 차오른다. 이제 이른 봄 초록빛 미나리만 보면 봄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시던 '미나리할머니'가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