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하루

by 정은숙

"손자가 할머니 드리래요"

침대에 5만 원권 두장을 어머니 손에 쥐어드린다.

"이게 얼마야"

"10만 원이요"

지폐를 받은 어머니가 침대 머리맡에 있는 손가방을 끌어당기더니 안에서 흰 봉투를 꺼낸다. 봉투 겉면에 큰 글씨로 37만 원이라고 쓰여있다. 이내 봉투에 들어있는 지폐를 꺼내더니 천천히 헤아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돈을 누가 줬다고?"

"손자요"

"얼마 준거야"

"10만 원이요"

고관절 수술로 6개월 입원 후 퇴원한 어머니는 최근 들어 기억력이 흐릿해지셨다. 몇 년 전만 해도 다니시던 교회에서 치매검사를 받았을 때 가장 총기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며 자랑하시던 목소리가 선연하다. 평소 성경도 읽으시고 뉴스를 많이 보셔서 나보다 국제정세에 밝으셨는데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증세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어머니 점심 밥상은 토란줄기를 비롯한 다섯 가지나물볶음, 뜨끈한 동태탕과 오곡밥으로 차렸다. 밥상이 들어오기 무섭게 '입맛 없다'는 말을 무한반복하신다. 반공기밖에 안 되는 밥을 기어이 한술 덜고 간신히 찌개국물에 말아 몇 술 드시더니 냉수로 배를 채우신다. 억지로라도 드시라는 성화도 소용없다. 입맛이 없으니 아무리 채근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식사를 마친 어머니 시선이 tv에서 방영 중인 야구경기로 집중된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침대에 걸터앉아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일과는 곁에서 돌보는 자식들과 대화, 낮잠, tv시청이다. 따듯한 딸들은 어머니가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도 귀찮은 내색 한번 없이 대답해 주고 대화를 이어간다. 한 번쯤 짜증이 날 법 하지만 오히려 생활패턴을 훤히 알고 있으니 맞춤형 대응에 익숙하다.

채널을 바꿔 tv에서 <나는 자연인이다>가 방영 중이다. 고로쇠물 채취 장면을 보시던 어머니가 관심을 보인다. 바로 눈치챈 딸이 며칠 전 갖다 둔 고로쇠물 한잔을 건네니 맛있게 드신다. 아프신 뒤로는 몸에 좋다는 말이 가장 좋은 처방이다. 물론 약발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지만.


대보름 전날, 어머니 집 창밖에는 봄비가 내리고 마당에 꽂아둔 바람개비가 세차게 돌아간다. 집 근처에서 떠돌다 우리 집 식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고양이 얼룩이도 거실 입구에 자리를 잡고 나른한 표정으로 오후 한때를 보낸다. 느긋한 표정으로 tv를 보시던 어머니는 곧 스르르 낮잠을 청하실 것이다. 곁에서 커피를 마시며 유쾌한 시누이의 웃음소리와 농담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봄비가 내리고 나면 마른 나뭇가지들도 봄마중에 바빠지리라.


작가의 이전글엄마의 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