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뭐 했어"
"마을회관에서 대보름밥 먹고 왔지"
모처럼 안부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정월 대보름밥을 해 먹는지 묻는다. 매년 엄마는 바쁜 딸을 위해 오곡밥, 세 가지나물과 동태탕까지 끓여 주셨다. 괜한 빌미를 주면 또 음식을 해주신다는 말이 나올까 싶어 알아서 챙겨 먹겠다고 안심시키며 전화를 끊었다. 바로 남편과 집 근처 전통시장으로 향했다. 해 질 무렵이라 대부분 매장은 슬슬 파장분위기인데 채소가게 근처는 줄을 설 정도로 사람이 몰려있다. 나처럼 늑장 부리다가 대보름 준비를 하는 사람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 젊은 외국인들이다. 시골에 일손부족으로 외국인 계절근로자가 늘면서 전통시장도 주말이나 저녁시간에는 그들로 문전성시다. 가끔 외국에 여행이라도 온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물만 부으면 되는 불린 오곡쌀과 호박꽂이, 오가피나물, 시금치까지 갖가지 나물들을 파는 곳이 여러 곳이다. 밥양을 가늠하며 망설이는 걸 눈치챘는지 전을 부치느라 손길이 바쁜 주인 대신 옆집 화장품 가게 주인이 선심을 쓰며 불린 오곡밥쌀을 인심 좋게 두어 번 덤으로 담아준다. 금세 우리도 공범이 되어 주인 눈치를 살피며 잡곡쌀을 장바구니에 재빠르게 넣는다. 볶은 나물 두 가지와 오곡밥쌀, 봄동, 남편이 좋아하는 고들빼기 무침을 산 후 발걸음을 재촉한다.
지난밤 엄마와 통화 후 동행하는 동생에게 내일 집에 잠깐 들르라고 했다가 내친김에 엄마와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말했다. 매일 마을 회관을 출근하는 엄마도 특별한 일정이 없다는 말에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면 좋겠다 싶어서였다. 문제는 어제부터 감기에 걸린 남편. 옆에서 연신 콜록거리는 남편에게 엄마를 초대했다고 말했더니 감기가 전염될까 염려한다. 엄마가 기관지가 약해 정기검진을 받는터라 내일 아침 상태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하룻밤이 지났는데 여전히 남편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감기가 호전되던 아들까지 미세한 감기증세가 있다. 간신히 감기 기운이 지나갔나 했는데 다시 옮았나 싶어 얼른 감기약을 먹었지만 잠시 갈등이 인다. 엄마와 약속을 미뤄 야나 싶어 오전 9시가 채 안 돼 동생에게 전화했더니 "엄마 벌써 화장하고 머리에 구르프까지 다 말았어"라며 웃는다. 동생말에 되돌이킬 수 없구나 싶어 엄마와 점심식사를 감행하기로 했다.
설 명절 이후로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집에서 15분 밖에 안 걸리는 거리인데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내가 바쁘다는 핑계다. 명절 전후로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아 병원을 여러 차례 다녔고 평일은 출근하니 안부전화도 제대로 못한 것이다. 모처럼 집밥으로 미안함을 만회할까 했는데 상황이 복잡하게 된 것. 자식이 칠순이 되어도 부모 입장에서는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했던가. 엄마는 늘 매일 동동거리며 사는 큰딸을 걱정한다. "운전 조심해라" "너무 바쁘지 않게 몸도 챙기며 살아라". 항상 바쁘게 사는 딸을 염려하는 마음을 알면서 안부 전화는 왜 이리 어려운지.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일까. 지금이 아니어도 좀 한가해지면 그때 밀린 효도를 해야지 하는 게으름 탓이 더 클 것이다. 갑자기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고 이미 팔순을 넘긴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어쩌면 생각보다 얼마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냉장고에서 봄동을 꺼내 물에 담가 놓고 어젯밤 미리 끓여놨던 감자탕을 다시 한소끔 끓인다.
들기름을 둘러 두부도 지지고 곱창김도 잘라 접시에 담는다. 모처럼 딸의 식사 초대에 설레는 기분으로 곱게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설 엄마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이 빨라진다. 내 손으로 엄마에게 밥상을 차려 드린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타지에서 대학을 다닐 무렵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올 때마다 귀한 손님 맞듯이 매번 진수성찬을 차려주던 엄마의 집밥은 늘 보약이었고 사랑의 다른 말이었다. 평생 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당연하게 받아먹던 시간과 횟수는 헤아릴 수 없다. 봄나들이 가듯 딸네 집으로 오고 있을 엄마에게 오늘은 따뜻한 오곡밥과 보름나물, 두부부침, 봄동겉절이, 묵은지를 넣어 푹 고아낸 감자탕까지 모처럼 맛있는 한 끼를 대접해야겠다. 오늘 밤에 환한 대보름 달이 뜨면 엄마의 건강과 행복을 오래도록 기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