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금 후면 오랜만에 4명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서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식탁은 크지만, 갈 곳 없는 세간살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좁다. 연중행사로 사용하는 토스트기, 냄비 받침대, 유통기한이 길고 손이 가지 않는 사탕, 젤리가 잔뜩 들어있는 간식통, 조미김과 먹다 남은 과자 봉지가 있는 바구니 등이 나름 질서를 유지하면서 테이블의 삼분의 일을 점유하고 있다. 손이 빠른 아내는 모두가 좋아하는 김치, 두부를 첨가한 냉동부대찌개, 둘째가 좋아하는 계란찜, 그리고 첫째가 며칠 전부터 졸랐던 고등어구이를 동시에 하고 있다. 여러 개 요리가 막바지가 되었는지 여러 개 사인을 보낸다.
"아빠, 애들을 깨워주세요"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 주시고 수저를 놔주세요"
"김치는 열무, 생 김장, 묵은지 중에서 고르시고요"
먼저, 자고 있는 애들을 살살 스킨십으로 깨우고, 곧 식사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눈빛을 확인한다. 그리고 냉장고로 향한다. 온라인에서 대용량으로 구매한 덕택으로 매 끼니 소진하고 있는 시금치, 씹히는 맛이 일품인 진미채 볶음을 꺼내고, 옆의 김치냉장고에서 양념이 살아있고 아삭하며 풋내 나는 생 김장김치를 선택한다. 첫째와 둘째 보호색을 가진 수저들이 자리를 찾아가고, 나머지 색깔들은 부모한테 선착순으로 간다. 요리들이 주방에서 식탁으로 하나씩 이동하기 시작하면, 애들 방들을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면서 등을 일으켜 세우고 안쓰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을 한다.
"식사 준비 다 끝났어"
"뜨거울 때 먹어야지"
"엄마 아빠 먹고 치울 거야"
아이들은 TV를 바로 볼 수 있는 식탁에 서로 마주 보면서 앉고, 부모는 세간살이 때문에 좁아진 테이블을 서로 마주 보면서 앉는다. 부모는 의자를 아이들 방향으로 틀어서 공간 활용도를 높인다. 남편은 오른팔을 뻗기 쉽지만, 아내는 뻗기가 불편한데, 벌써 10년째다. 와이프가 첫째와 둘째 중간에 요리들을 배치하면, 밑반찬은 자연스럽게 부모 사이로 떠밀려 온다. 첫째는 스마트폰으로 미식 유튜브를, 둘째는 태블릿을 가져와서 한창 인기인 예능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먹는다. 남편은 아이들을 보면서 먹고, 아내는 아이들과 반찬을 번갈아 보면서 편식을 감시하고 부족한 반찬을 채워 준다. 첫째가 고등어 생선구이에 식탐을 부리면, 아내가 반을 툭 잘라서 내 밥 위에 올려주면서 한마디 한다.
"아빠도 먹어야지"
남편은 첫째 눈치를 힐끗 보고, 흐뭇해하면서 입에 넣는다.
둘째가 밥 먹는 게 시원찮으면, 아내는 반찬을 따로 소분해 둘째 밥그릇 옆에 놓으면서 말한다.
"이 정도는 먹어야지"
남편은 둘째 반찬을 보고, 먹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애들이 학교에 가 있거나 약속이 있으면 애들 자리는 우리 차지다. 첫째가 식탁에 앉는 날이 적어지면서 내 차지가 되고 있다. 그러면 TV를 켠다.
2.
부사장급 조직에서 회의 참석 요청 메일이 왔는데, 내 이름도 적혀 있는 회의실 좌석 배치도가 포함되어 있다. 전면 스크린을 중심으로 U자형 구조로 두 줄로 책상이 배치되어 있고, 앞 줄은 임원급들이, 뒷 줄은 실무들이 촘촘하게 배치되어 있다. 책상에는 두 명이 앉을 수 있는데, 난 두 번째 줄이고 스크린 쪽에서 세 번째 책상의 첫 번째 의자다.
예정 시간보다 몇 분 일찍 회의실에 들어가니, 문 앞에 간식과 생수가 놓여 있길래 몇 개 집었다. 퍼실리테이터가 사원 카드를 보고는 자리를 안내한다. 앞 줄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는데, 아마도 정각에 도착할 것이다. 참석 명단에 없는 실무자들도 참석하다 보니 뒷 줄은 좌석 간격이 좁다. 화상으로 참석해도 되는데 발표와 연관이 있는 실무자도 참석을 했다. 퍼실리테이터가 실무자 대상으로 앞 줄이 여유가 있으니 앉으라고 가이드하는데, 실무자들은 기어코 뒷 줄을 비집고 들어간다. 호스트 책상에는 널찍하게 사용하도록 아예 의자가 하나 빠져 있고, 책상에는 생수, 유리컵, 노트, 펜이 정돈되어 놓여 있다.
호스트가 도착해서 앉자 사인을 보내니, 퍼실리테이터가 회의시작을 알린다. 안건에 맞추어 호스트를 바라보면서 5명이 각자 발표를 한다. 첫 번째 발표자는 호스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쉽게 설명하고, 질문에 답변하고, 추가로 필요한 것은 액션아이템으로 정리했더니, 벌써 시간이 삼분의 일이 지났다. 이제 마지막 내 차례인데,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퍼실리테이터가 Wrap-up도 해야 하니, 마지막 안건은 다음번 회의에서 하자고 제안한다. 황당함을 숨기면서, 호스트를 쳐다보면서 말한다.
"간결하게 빨리 끝내겠습니다."
"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진행하세요."
호스트의 동의로 보고를 시작한다. 다음 회의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씩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뜬다. 호스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참석하든 말든 상관없다. 호스트만 자리를 지키고, 이해하는 제스처를 이끌어내고, 질문을 해주면 된다. 다음번 회의에서 좌석 배치도를 받고 싶지 않다.
3.
연말 고과 기간에 회식이다. 오늘은 웬일로 전원 참석하고, 2차로 노래방까지 간다. 1차에서 알코올 적량을 초과했더니 음치와 박치임에도 걱정이 없고 기분이 좋다. 먼저 노래방을 주도한 친구가 마이크를 잡고 십팔번을 뽑는다. 뒤이어 유행에 민감한 신세대가 아이돌 최신곡을 부르더니 이후 몇 사람이 연거푸 불러댄다. 그러자 누군가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면서 팀장을 부른다.
"팀장님", "팀장님", "팀장님"......
다른 사람들도 호응하면서 팀장님과 손뼉이 방가득 울려 퍼진다. 1차 회식 자리에서 팀장님 말씀이 있었다면, 2차에서는 노래가 있다.
팀장은 앉은자리에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면서 긍정의 신호를 보내더니, 리모컨을 쥐고 버튼을 누른다. 누구나 아는 대중가요의 간주가 흘러나오고, 모니터 앞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자 구성원들은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팀장과 관계가 좋거나 가무가 뛰어난 구성원들은 어느새 팀장 옆에서 분위기를 돋우고,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둘러싼다.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맞추어 박수를 치고, 흥이 나면 탬버린을 치거나 어깨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주위의 호응으로 뽐내는 목소리가 절정을 치닫으면, 다 함께 어깨동무로 팀워크를 보여주면서 마무리를 한다. 노래가 끝나면 점수와 무관하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서로 등을 토닥인다. 그리고 모두 다 함께 일어나서 건배를 한다.
얼마 후 TV를 보는데, '모구청장이 노래자랑 프로그램에서 마이크를 잡았을 때, 공무원들이 백댄서를 했습니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는데, 공적 업무와 출장 처리를 제외하면 흔한 노래방 회식의 연장선이고 자리배치이다.
이제 구조적 본능을 적나라하게 알게 되었으니, 변화가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