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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개의 로마(7)

-보편제국 이념을 중심으로-

by 글쓰는 인문학도

2. 동로마제국의 로마적 정체성




2.1. 들어가며: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동로마 제국의 생존


흔히 476년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자 고대 로마 제국의 종말로 기억합니다.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 사건을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일 뿐, '로마 제국' 전체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도아케르의 반란 당시 로마 제국은 이미 동서로 나뉘어 통치되고 있었고, 동쪽에는 여전히 로마 제국의 절반이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동쪽에 살아남은 로마 제국을 '동로마 제국' 혹은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릅니다.


2.2.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 서구 중심적 역사관과 '로마'의 독점


그런데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은 사실 근대 서유럽 사람들이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제국을 **'비잔티움'**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로마인(Ῥωμαῖοι, Rhomaioi)'**이라 불렀고, 자신들의 제국을 '로마 제국(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Basileia Rhōmaiōn)', 자신들의 언어(그리스어)를 **'로마어(Ῥωμαϊκή γλῶσσα, Rhōmaïkḗ glṓssa)'**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서유럽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여기에는 '로마'라는 유산을 독점하고자 했던 서구 중심적인 역사관이 작용했습니다. 즉, 동로마 제국은 더 이상 '진짜 로마'가 아니며, '진짜 로마'의 역사는 서유럽, 자신들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칭은 마치 동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와는 단절된, 그리스인들만의 국가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이는 근대 서유럽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대 로마 제국과 연결 짓고, '로마적 정체성'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2.3. 동로마 제국의 자기 인식: '로마인', '로마 제국', 그리고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


그러나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로마인'**이며, 자신들의 제국이 단 한 번도 멸망한 적 없는 '로마 제국' 그 자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고대 로마의 법과 제도를 계승했고, '로마 황제'의 전통을 이어갔으며, 자신들의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로마(Νέα Ῥώμη, Nea Rhomē)'**라고 부르며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단순히 새로운 수도를 넘어, 문명 세계의 중심지이자 보편 제국의 유일한 수도라는 상징성을 지녔습니다.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만국(oecumene)'**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전 세계', '온 세상'**을 의미하는 말로, 콘스탄티노플이 전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동로마 제국이 스스로를 '보편 제국', 즉 전 세계를 아우르는 유일하고 영원한 제국으로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2.4.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엇갈린 시선: '공화국'인가, '전근대 민족 국가'인가, '로마 제국'인가?


동로마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쟁거리입니다. 근대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며 폄하했고, 심지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에드워드 기번과 같은 학자는 동로마 제국을 **'나약하고 부패한 제국'**으로 묘사하며,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동로마 제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이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이 아니라, **'군주제적 공화국'**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황제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았고, 원로원과 시민들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7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이 영토가 축소되고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전근대 민족 국가'**로 변모했다고 주장합니다. 즉, 더 이상 '보편 제국'을 지향하지 않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특정 집단, 즉 '그리스 민족'의 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5. '그리스'와 '로마'의 이분법: 근대의 발명품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그리스'와 '로마'를 서로 대립적인 개념으로 구분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라고 하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 지역에 기반을 둔 문화를 떠올리고, '로마'라고 하면 라틴어를 사용하고 이탈리아 지역에 기반을 둔 문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고대 후기, 특히 동로마 제국 사람들에게 '그리스'와 '로마'는 사실상 동의어였습니다.

당시 지중해 세계는 이미 오랫동안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리스어는 동지중해 지역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 사람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들을 '그리스인'으로, 그들의 제국을 '그리스 국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국가를 '영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오류입니다.







다음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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