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1)

장편소설

by 김기현

1부

1

나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아버지는 이십 대에 강원도 철원에 있는 부대에서 복무하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운이 좋게 인천에 있는 부대로 발령받아 거기에서 전역할 때까지 복무했다. 그 덕에 나는 도심에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만약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그 나름의 유쾌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 보았던, 한 반에 몇 개 학년의 학생이 섞여 있고 하교 후에는 개구리나 잡으러 다니는 삶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한 학년에 반이 열 개씩이나 되는 큰 학교에 다니고, 하교 후에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가 만화책방에 가는 그런 삶을 열망했다.

아버지는 부사관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부사관과 장교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다음 중학교 일 학년이 되는 것처럼, 아버지의 계급도 브이가 더해지다 보면 다이아몬드가 그려진 계급으로 진급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결코 넘나들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차이를 언제 깨달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것은 소년이 수음을 깨닫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그 차이를 깨달은 뒤로는, 나에게 커서 군인이 되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장교가 되라고 말했다. 그런 것은 아마 어느 집안에나 있는 범속한 교육, 혹은 강요일 것이다. 예컨대 좋은 학벌을 가지지 못한 부모가 자식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에 가야 한다고 주입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들에 비하면 나는 상당히 합리적인 편에 속하는 요구를 받은 셈이다. 아버지는 내게, “육사에 가면 좋겠지만, 꼭 육사가 아니어도 괜찮다”하고 말했다. 나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부모님이 하라는 것은 하기 싫었다. 특별히 청개구리 기질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부모의 지시라는 건 한 번 듣기 시작하면 계속 끌려다녀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다. 특히 어린 시절의 나에게 육사에 가라는 건 ―어차피 나의 두뇌와 태도로는 갈 수 없었지만― 전투용 로봇이 되라는 말과 별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절정에 이른 찬란한 시기에 전쟁을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니, 그런 것은 마치 1930년대 독일에서만 있을 법한 일로 여겨졌다. 내가 그토록 군인이 되는 일을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마 어린 시절에 보았던 전쟁영화에서 인간이 무의미하게 죽어 나가는 이미지가 기억에 남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누군가는 군인이 되어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존경받을 만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의 복부를 수술용 칼로 가르며 생명을 구하는 데에 인생을 건 사람도 있고, 얼굴이 터질 듯 트럼펫을 부는 일에 인생을 건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군인이 되었다. 물론 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아버지의 소망 혹은 저주가 효험이 있었다는 편이 더 가까울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성적은 참으로 애매했다. 대학 입학을 포기하긴 아깝지만, 대학에 가자니 명성 있는 대학이나 흥미 있는 학과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내 몸에 맞는 옷을 고르듯이 내 성적에 맞는 대학과 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성의 없이 선택한 대학 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따분했다. 교수들은 아침부터 주식장이라도 본 것인지, 몹시 우울한 표정으로 꾸역꾸역 강의를 해냈고, 학생들은 그에 반발이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에서 하품과 한숨을 반복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이런 무의미한 수업이 왜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지 그에 대해 불만 섞인 의문을 품었다. 물론 강의를 성실히 듣고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학생들에게는 그런 강의들이 소중하고 유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강의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대학에서만큼은 외우기를 강요하는 수업이 아닌 생각을 일깨우는 그런 강의를 기대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 수업도 결국 고등학교 수업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우울한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전공 수업은 낙제하지 않을 정도로만 수업을 들었고, 과제를 제출했다. 오히려 나는 ‘영화의 역사’나 ‘미국 문학의 이해’와 같은 교양 강의를 더욱 성실히 들었다. 덕분에 나는 뤼미에르 형제부터 시작된 영화의 역사를 더듬으며 알프레도 히치콕, 세르지오 레오네, 코폴라와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먹어 치우듯이 보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한 영화는 《Once upon a time in America》였다. 이 영화는 정말 하루 종일 몇 번이고 반복해서―영화가 길어 몇 번 반복하지도 못하겠지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같은 시기에 나는 피츠제럴드와 윌리엄 포크너, 헤밍웨이의 소설도 읽었는데, 스무 살의 나에게 그들의 소설은 어쩐지 너무 심오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가 나의 마음을 얼마쯤 움직였지만, 그래도 그들의 위대함을 온전히 깨닫기에는 나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덮은 뒤에는, 몇 년 뒤에 다시 읽으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 시기 나는 그저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독파하는 데 몰두했고, 그러한 방식으로 인생의 부피를 키워갔다. 나 같은 인간은 결국 사회가 구성한 교육과정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스무 살 여름에야 깨우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공부하기가 싫어 학군사관으로 도망쳤느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단정을 짓겠다. 진흙탕을 피하자고 오물 밭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즈음 나의 어머니의 작은 사업이 호황이어서, 내겐 또래에 비해 풍족한 적금이 쌓여 있었다. 그러니 학교 같은 건 잠시 뒤로 하고 소설의 무대가 되었던 미국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계획을 세워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곧 내게는 돈을 모아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당시 내게는 열여섯 살 때부터 줄곧 만나왔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난 해에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한국을 떠나서 살고 싶어.”

“왜?”

우리는 전철을 타고 있었고, 그녀는 창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을 통해 하늘에 걸린 윤곽이 또렷한 구름에 시선을 던졌다. 그때는 여름의 가운데였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어. 던져진 채로 하릴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내가 내 환경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 더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아직은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대신 나는 그날 이후로 그녀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몇 년이나 걸렸지만, 그게 나의 방식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성실하게 공부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 적어도 자신의 유전적 한계는 어느 정도 깨부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스무 살의 문을 닫을 무렵, 호주로 이민 갈 것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 우리.” 그녀가 말했다.

“좋아.”

“정말 괜찮아?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도?”

나는 몇 초간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화성에 가겠다는 것도 아닌걸.”

“하지만 인천과 시드니는 열 시간이나 비행해야 하는 거리야.”

“비행기에서 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를 두 차례 하고도 절반이나 볼 수 있겠네.”

우리는 다음 달에 결혼하였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결혼식 없는 결혼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허락을 구할 수 있었지만 ―허락보다는 통보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테고 불필요한 언쟁을 피하고 싶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었다. 그녀는 나의 부모님 앞에서, “성인이 되었으니, 제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책임지고 싶어요”하고 말했다. 나의 부모님은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우리는 돈을 합쳐 보증금을 마련해, 그녀가 다니는 학교와 내가 다니는 학교 가운데에 있는, 작은 방이 두 개 있는 빌라를 구했다. 가전이라고 할 게 없어 ―전부 중고로 얻어온 것들뿐이었다― 신혼집이라고 말하기엔 민망했지만, 엄밀히 말해 신혼집이었다. 우리는 월세와 관리비, 식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빨리 학군단에 들어가 장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징집되어 병사로 입대해야 했고, 군에 있는 일 년 구 개월 동안 그녀를 혼자 두어야 했다. 나는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나 같이 개인적인 인간은 회사에서 탐탁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회사 생활이 유쾌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장교가 되면 처음 몇 년은 다소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계급이 높아질수록 처우가 점점 나아지지 않겠나, ―아마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고 생각했다.

그즈음 나는 수업을 마치면 학교 근처에 있는 호프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정말 그 시절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손님이 오면 물과 메뉴판을 주고, 주문을 받아 컴퓨터에 입력한다. 주방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동안 술과 기본 안주를 먼저 내고, 음식이 만들어지는 대로 음식을 낸다. 이따금 작은 접시와 수저를 설거지하고, 손님이 일어서면 계산을 받고 테이블을 치운다. 일련의 업무가 매우 단순했으나 지루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제각각의 손님들을 관찰하는 일과 생맥주를 따르는 일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커다란 생맥주 통에서 기계를 통하여 잔을 황금빛으로 가득 채우는 일에는 손맛이 있었다. 얼마만큼의 거품층을 만들 것인지 또한 나의 손에 달려 있었다. 나는 사장님의 배려 아래 퇴근을 삼십 분 정도 남겨놓고는 생맥주를 마시며 일할 수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브라이언 맥나잇의 노래를 틀고서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누구도 그의 음악을 트집 잡는 일은 없었다.

수영은 ―아내의 이름은 수영이다― 꿈에 그리던 의예과에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학교의 간호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녀는 학교생활과 동시에 과외를 시작했다. 과외가 예전만큼 빛을 발하던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찾는 이들이 많았고, 물론 그녀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녀는 학교에 다니는 사 년간 단 한 학기도 빼놓지 않고 과외 수업을 했다. 학교 수업과 과제, 실습, 시험 준비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빽빽했는데도, 그녀는 결코 과외를 놓지 않았다.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치른 간호사 면허 시험에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합격했고, 졸업과 동시에 신촌에 있는 병원에 취직했다. 얼마 뒤 나도 뒤따라 임관하여 남양주에 있는 부대로 발령받았다. 우리는 서로의 직장을 고려해 왕십리에 빌라를 새로 얻었고, 나는 작은 세단을 중고로 샀다. 우리는 스물넷이었다.

“칠 년간 일하고 서른하나에 떠나는 거야.”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