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의 이면과 맞춤형 복지
어릴적 내가 살던 동네는 제주시에서도 외곽의 끝, 내도동이란 곳이었다. 제주시에 속해는 있으나 외곽의 끝이라 시내에 들어가는 걸 성안에 간다고 했다. 간혹 버스를 타고 제주시에라도 갈라치면 전날부터 잠을 못잤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에는 큰 고아원이 두곳이나 있었다. 초등학교도 작아서 딱 두반씩만 있었는데 우리반의 상당수가 고아원 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어디 출신인지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심지어 고아인지 나는 몰랐다. 겨우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고아가 뭔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겨울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어느 날 일군의 아이들이 일제히 새 잠바를 입고 오는데 모두 똑같았다. 그리고 일제히 새 문구 세트를 갖고 와서 펼치면 오히려 제집, 제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보육원 친구들을 더 부러워했다. 어느날 학교에 갔는데 교실에 아이들 상당수가 똑같은 색의, 그러나 맞지도 않는 똑같은 크기의 옷을 입고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어린 나의 시선에서도 몹시 생경한 장면이었다.
사실 나는 그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도 없는 새 잠바를 입고있는 것이 부러웠다. 아이들이 일제히 꺼낸 학용품 세트는 제주에서는 좀처럼 보기어려운 서울 물건들이었다. 나는 그 친구들이 부러워 곁에서 빙빙 돌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지못하는건 그 친구들이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뭔가 남의 옷을 입고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듯 똑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은 서로를 보려하지 않았다.
최신 잠바와 문구세트는 부유한 자선가들이 불쌍한 고아들에게 불편부당한 선의로 베푼 일이었을 것이다. 돈만 기부하고 고아원장이 샀을수도 있고, 물품으로 기부했을 수도 있다. 이 불편부당한 선의의 결과, 반 아이들은 항상 같이 놀던 친구들 중 일군의 무리들이 고아원이라는 시설 소속 아이들이란 걸 알아버리게 되었다. 이 불편부당한 선의는 남녀도 가리지 않고, 일제히 고아들은 선의를 받으라는 지령에 묶인듯이 이들을 솎아매었다. 그때부터 우리반은 고아원 아이들과 일반 아이들로 자연스럽게 나뉘기 시작했다. 새 잠바를 입고 다니는 아이들은 고아원 아이들이니 주변에서 같이 놀지말라는 말도 들렸다.
선의를 베풀때는 불편부당하면 다 좋은게 아니다. 물론 균등하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어차피 선의라는 것이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도우려는 것이라면 개별적 사정과 형편도 두루 살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일 경우, 장애인일 경우, 자기의 곤궁한 형편을 잘 얘기하기 어려운 사람들일 경우 더욱 그렇다. 때로 오히려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향해 더 편향적이어야 하고, 개별적 상황에 맞게 합당하여야 한다. 기계적으로 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형편을 세심히 살펴 편향적이고 개별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바로 “맞춤형 복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