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에 대해 경로를 돌아보는 짧은 글을 쓴다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 어떤 누군가에 대해, 쓴다는 것은 참으로 가볍고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위인이건 아니건 그의 일생이 결코 한 단락으로 정리되지 않을텐데 한사람에 대해서 쓴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부담되는 일이다.
처칠. 그는 알면 알수록 짧게 요약할 수 없는 인물이며, 처칠이라는 한 인간과 2차대전이라는 세계대전의 역사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생애와 세계대전의 역사를 분리할 수 없다면 그는 결국 세계사와 함께한 인물이다. 세계사의 태피스트리에 그 자신이 날줄 씨줄 어느 하나를 엮었거나, 혹은 커다란 무늬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았다.
영화 스타워즈 본편을 쓰고서도 장대한 이야기는 프리퀄, 에피소드, 더 비기닝 등 무수히 쓰고도 남는다. 그정도로 처칠에게는 긴 서사의 힘과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 있었던 전쟁의 추동력이 있다. 따라서 이번엔 일단 제1편으로 겉만 훑어보고 가벼운 소개글만 먼저 쓰는데 만족해야겠다. (계획은 1편- 처칠, 2편- 처칠과 War Room, 3편 - 2차 대전과 지정학 등...계획대로 될라나 모르겠다 ㅠㅠ)
흔히 처칠을 명문가의 후손으로 젊은 나이에 가문의 후광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이것저것 하다가 나중에 수상까지 하고, 노벨상까지 받은 사람 아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인생이 기승전결 같이 계속 상승세에만 있던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혹은 신경질, 우울증으로 못미더울 사람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처칠의 인생경로를 돌아보면 그는 타고난 후광 못지 않게 자신을 연마하였다. 선친의 후광, 명문가집안 배경 덕분에 일찍이 의원, 장관 등 고위직을 두루 섭렵한 것까지는 사실이나 연거푸 실패하고, 별 성과없이 물러났다. 이후 스스로 독서, 글쓰기, 정치력 등으로 통찰력을 키우고 있다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결국 수상에까지 올라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처칠이 받은 노벨상도 정치인에게 주는 노벨평화상이 아니었다. 1차 대전 이후 2차대전 사이 전간기 기간, 이후 대영제국의 수상으로 직접 2차대전을 겼었던 경험을 직접 서술한 “2차 대전사”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책은 정말 강추한다. 역사 서술방식, 국가들을 보는 처칠의 사고방식, 주옥같은 표현 등도 좋지만, 워낙 두꺼워서 낮잠 잘 때 배개로도 좋다.
처칠은 1874년생으로 3수 끝에 영국 왕립군사학교에 입학하고 수단, 인도 등에 파병되어 군복무하며 종군기자로도 활약한다. 집안의 후광으로 1911년 (37세 ) 1차대전 때 해군장관(1911-1915)을 역임한다. 이 시절, 갈리폴리 작전에서 대실패한다. Galipoli failure. 이때 5만여명의 군인이 사망하여 처칠도 사퇴하고,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
이를 만회하려고, 처칠은 1차대전에 다시 육군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종전후 귀국한 뒤 신중함과 겸손함을 배우고 낮은자세로 임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관직을 경험했고, 1924년 (50세) 재무장관까지 섭렵한다. 그러나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전세계를 휩쓰면서 내각 총사퇴한다.
이후 약 10여년 동안 의원엔 당선되지만, 공식직함도 없고, 아무도 신경안쓰는 사람이 된다. 의원생활 & 야인으로 지내면서 글쓰기, 정치 논평을 계속, 독일 히틀러의 침략주의를 비판한다. 1939년 히틀러의 독일재무장, 유럽 침공이 본격화되면서, 처칠은 65세의 나이에 30여년만에 해군장관으로 다시 지명된다. 이듬해 1940.5.10(66세), 수상 &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고, 1945년까지 2차 대전을 지휘한다.
“평생 먹고살 돈을 혀와 펜으로 벌었다.”
말과 글쓰기 - 처칠, 그 자신의 말처럼 처칠은 “평생 먹고살 돈을 혀와 펜으로 벌었다.” 처칠이 20대에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30대에 입각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글 솜씨 덕분이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처칠은 짧은 장교 생활을 접고 ‘모닝 포스트’지(紙)의 기자가 되었다. 1899년, 보어 전쟁에 종군 특파원으로 파견된 처칠은 탈선한 열차에서 부상병을 구하려다 포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한 달 만에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이듬해 7월 영국으로 귀환했는데, 당시의 경험을 드라마틱한 종군기로 연재해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이처럼 뛰어난 작가였던 처칠의 펜 끝에서는 명연설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연설들은 마법처럼 영국인들을 일으켜 세웠다. 존 F케네디 대통령의 말대로 처칠은 “영어라는 말을 동원해서 전투에 내보냈”던 것이다.
전시 작전이나 명령도 오직 문서로만 명확히 지시 - 전쟁내각은 5-6명 정도의 장관으로 구성. 평상시의 일상적 업무는 관여 안함. 전쟁내각에서 처칠은 지침을 내리며 “전쟁중 본인의 지시는 오직 문서로만 in writing 내릴 것임을 먼저 천명”한다. 전쟁기간중 최고 지침이나 지시를 구두로 할 경우 오해, 왜곡, 불이행 등 문제 발생을 우려한 것이다.
현장에서 행동으로 ㅡ 처칠은 매일, 폭격된 지역에 출현. 시민들 격려하며 용기있는 지도자 모습 보여주었다. (겁쟁이 리더는 필요없다) 밤에는 런던 시내 곳곳에서 공중에 서치라이트를 가동했다. 그러면 900만 런던시민들이 이걸 보고 영국 정부도 뭔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하고있구나 하고 안심했다고 한다.
소명의식 - 아무 관직이 없던 10년 동안 처칠은 스스로 유럽 주요국가의 관계, 전비 증강 태세, 의도와 능력 등을 분석하며 준비해갔다. 공식적인 장관이나 책임자가 아닌데도 스스로를 영국 국정의 책임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주체적인 생각, 행동, 그리고 리더쉽 발휘. 처칠은 더이상 자기의 말이 안통하자 일개 의원으로 직접 대국민 호소를 한다. 당적에 상관없이 의회, 신문, 라디오 연설로 영국 정부를 비판하고 당장 히틀러를 막아야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재무장이 본격화되면서 영국에서는 처칠의 말이 서서히 먹혀들어간다.
소명과 기회 - 루스벨트와 처칠의 경력, 커리어를 보며 드는 생각은 사람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이다. 루스벨트, 처칠 모두 1차대전때 중요 자리에서 업무를 보고 전략적 마인드를 훈련해왔다. 이것이 더 큰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그런데 이건 누가 윗사람들이나 국가가, 혹은 어떤 집단에서 이들을 차기 리더로 보고 키운것은 아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그 순간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간 것이다. 소명의식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준비를 했다고 해서 기회가 오지는 않는다. 아마 처칠 말고도 이런 사명감을 가진 사람이 수십명은 더 있었으리라. 그런데 정작 기회가 왔을때 이런 준비가 된 사람이 없었다면 그땐 정말 그 나라에도 희망이 없다. 영국은 처칠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