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을 읽고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하던 사회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더 빨리 이겨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오늘날 청년들은 결승점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소설은 지금보다 10여 년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똑같은 생태계를 공유한다. 어쩌면 더 절망적일지도 모르겠다. 휴머노이드 로봇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간은 속도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채 로봇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있으며 동물인 말에게 시속 100km의 속도를 내게 하기 위해서 기수의 무게마저 비약적으로 줄이다 못해 로봇으로 대체했다. 느리다는 건 곧 패배와도 같은 말이었고 그 말은 곧 쓸모를 다했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세계가 10년 뒤 대한민국이다.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경마장에서는 빠른 말이 1등을 하지만, 느리게 달린다고 경기 도중 주로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애초에 천천히 달리는 것이 규정에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는 "천천히 달리기"를 이야기한다. 달리는 것은 안락사를 앞둔 경주마 투데이를 행복하게 하고 투데이의 행복을 맞닿은 몸을 통해 느끼는 로봇기수 콜리를 행복하게 하며, 투데이와 콜리가 주로 위를 달리는 모습을 보는 보경과 연재를 행복하게 한다. '달리기'란 곧 모두의 행복이며 존재의 가치를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쓸모를 다한' 달리지 못하는 말인 투데이를 '회생 가능'하게 만들기 위하여 택한 천천히 달리기는 '달리기' 그 자체에 초점을 둔 행위이다. 즉,『천 개의 파랑』은 전속력으로 달려 얻게 되는 '1등'이라는 행복의 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행복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휠체어 덕분에 걷지 못하던 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인도, 계단,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기술의 발달 과정에서 은혜는 철저하게 삭제되었다. 사람들은 지하로 가라앉은 은혜를 모르는 척 외면하더니 어느 순간 휠체어에 앉혀놓고 측은하고도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 기술이 너를 구원했다는 듯이 굴었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주로 위에 달릴 수 없는 말 '투데이'가 있다면 일상에는 걸을 수 없는 '은혜'가 있다. 엄마인 보경은 은혜의 장애를 위로하고자 '사소한 불편' 정도는 괜찮다고 위로하지만 그럴 때마다 은혜는 끊임없니 자신의 '비정상'을 자각하게 되고 한계를 실감하게 될 뿐이다.
기술의 발전을 상징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는 두 다리로 걷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은혜를 위한 발전은 겨우 휠체어가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의 사람들은 휠체어 위의 은혜를 보며, 스스로 살아갈 힘을 가진 은혜의 의지를 멋대로 깎아내리고 빼앗아가고 있다. 고작 매끄럽게 포장된 도로와 평지밖에 가지 못하는 휠체어는 정상인들의 위선의 결과일 뿐인데 말이다.
'레이싱'과 비슷해진 경마장에서 빠르게 뛸 수 없는 투데이가 자리를 뺏기고 안락사를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기술 발전은 철저히 '정상'의 두 다리를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범주에서 벗어난 은혜는 사회적 안락사를 강요받았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온전한 두 다리를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다리는 형체죠.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자유로움이에요. 가고자 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요. 자유를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주 잘 만들어진,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만 있으면 돼요. 문명이 계단을 없앨 수 없다면 계단을 오르는 바퀴를 만들면 되잖아요. 기술은 그러기 위해 발전하는 거니까요. 나약한 자를 보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강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연재가 은혜를 생각하며 만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가 더욱 소중하다. 이는 은혜에게 자유로움을 선물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항상 '정상인'을 향하기만 했던 기술의 방향이 그렇지 않은 이들을 향하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은재는 자신의 기술이 '나약한 자'를 향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은재가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바퀴'를 만든 이유는 나약한 자를 도와주기 위함이 아닌, 강한 은혜에게 그 힘을 극대화할 수 있는 부스터를 달아주기 위해서이다. 애초에 나약한 것과 강한 것을 나누는 기준은 고작 오르지 못하고 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다리'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투데이가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몸이 떨린다. 처음 주로에 섰을 때처럼.
행복해하고 있군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어요.
투데이에게 속삭인다.
여기에서 만족했다면 나는 내 삶의 2막을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더 빨리 달리고 싶어 하는 투데이의 바람을 모르는 척했더라면. 행복이 고통을 이겼다. 이 순간만큼은 예전처럼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은 콜리의 낙마로 시작하고 끝난다. 달리는 투데이의 심장박동을 통해 그의 행복을 느끼고, 함께 달리는 순간만큼은 자신도 살아있음을 느끼던 콜리가 스스로 낙마를 결정한 이유는 투데이의 행복이 곧 자신의 존재이유였기 때문이다.
가벼운 소재와 충격흡수 기술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만들어진 콜리는 약해질 대로 약해진 투데이의 연골이 자신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첫 번째 낙마를 선택한다. 폐기될 위기였던 콜리는 연재의 선택으로 2막을 얻었지만 이전보다는 무거워진 콜리의 무게를 투데이가 버티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고 두 번째 낙마를 선택한다.
두 번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콜리는 '행복이 고통을 이겼다'고 한다. "말을 살려야 하고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존재 자체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콜리가 느끼는 행복이지만 그 행복의 주체는 콜리가 아닌 투데이에게 있다. 콜리의 존재야말로 작가가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기술 발전 모습이 아니었을까.
소설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다. 투데이도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고, 은재가 발표한 새로운 기술은 수상까지 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콜리의 마지막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콜리는 엉덩이부터 상체까지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순간에도 고통을 느끼기보다는 푸른 하늘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콜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가 모두 하늘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전원이 완전히 꺼지기 전 "파랑파랑하고 눈부실 하늘"을 눈에 담은 콜리 또한, 다른 등장인물들처럼 조금이나마 '행복'을 느꼈기를 바라본다. 덕분에 무미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한 기술발전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