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고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살기 힘들다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SNS 속 현실은 다르기만 하다. 기억 속 '졸부'는 분명 부정적인 어감이었는데 요즘은 너도나도 장래희망이 졸부인 사람들처럼 군다. 모두 상황이 다 다르기 마련인데 30대 전에 1억을 모으는 건 성실함의 '평균'이 된 그들만의 암묵적 동의가 씁쓸하기만 하다.
사실 해방 이래 한 번도 돈을 욕망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겉으로는 노동과 근면을 미덕인 양 가르쳐온 사회가 갑자기 저더러 문맹이라니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라 그간 저나 제 부모님이 살아온 방식을....... 응, 실존을 부정당한 것 같아서.
(중략)
그게 꼭 그 아이들이 철없거나 허영심이 세거나 금융 문맹이라서가 아니라요, 제 생각에는.......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 가방으로. -「홈파티」 중에서
매달 들어오는 월급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닐 텐데 인터넷에서는 월급을 꼬박 예적금에만 넣는 것은 결국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잃는 것이라 일침 한다. 부모세대에서 돈을 모으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이었던 예적금은 지금은 투자공부를 하지 않는, 다시 말해 '부자 될 자격이 없는' 청년들의 전유물이 된 듯하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조언을 하는 것이 실례가 될 수 있음에도, 인터넷 속에는 남의 부의 축적에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는 모두의 인생목표가 '돈 벌기'라고 단정하는 전제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당신보다 돈을 더 빨리, 많이 모은 '나'는 당연하게 스승으로서 당신에게 훈수를 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좋은 직업을 가진 이 홈파티 주최자와 참석자들은 그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지원금으로 단칸방을 구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치품'을 사는 이 '허영심'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고 한마디라도 얹어야 속이 시원하다.
타인에게 무시당하며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돈에 상관없이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평민'인 내가 무리해서 사는 명품 가방은 '고생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고, '빈민'인 타인이 사는 명품 가방은 '사치품'이 되는 아이러니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만일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보다 일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전염병이 아니었다면, 그사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고, 노동 가치니 화폐가치니 하는 것들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도 저 윗집 부부처럼 밝은 얼굴로 이웃을 환대할 수 있었을까? 하고. -「좋은이웃」 중에서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이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시우에게 좋은 일이잖아. 좀더 나은 일. 그런데도 시우 어머니가 '새집으로 계속 와주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왜 흔쾌히 대답 못한 걸까? 지금보다 십오 분 더 멀어져서? 정말 그것 때문에?
-「좋은이웃」 중에서
가방이나 옷같은 물품뿐만 아니라 돈은 주거공간에서도 숨통을 조여온다. 30대에 아파트 산 방법, 청약 당첨 기술 같은 책들이 쏟아지며 너도나도 월급쟁이로 살면서 내 집마련을 꿈꾼다. 하지만 젊은 부부가 내가 '전세'로 살고 있는 이 집의 새집주인이 된다거나, 나보다 안 좋은 집에 살며 '연민'하던 마음에서 흔쾌히 배려를 건넨 대상이 청약에 당첨되어 새 아파트 집주인으로 가게 된다거나 하는 현실은 조금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위층에 새로 이사 올 부부가 인테리어 공사를 해도 되겠냐는 동의를 얻으러 밝은 얼굴로 집집마다 인사를 돌리며 답례품을 건네자, 서명을 해주고 뒤돌아서며 "자기들 집값에 비해 너무 약소한 거 아니" 냐며 답례품의 가격을 매기는 주희의 태도를 무작정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이야기 속 남편의 말처럼, "탐욕을 부리거나 투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생존' 좀 하겠다는 서민들의 치열한 몸부림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반동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손에 든 책을 보고야 비로소 종일 나를 사로잡은 깊은 상실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집을 잃어서도, 이웃을 잃어서도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 상실한 건 결국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고, 또 될지 몰랐던 우리 자신이었다는 뼈아픈 자각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서열화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 각박해지게 되는 건 남에 대한 배려나 공감이다. 남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고 그 틈에 있는 작은 흠이라도 찾아내려는 나를 자각할 때마다 스스로가 밉기만 하다. 내가 제일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 더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하지만 김애란은 소설 속 나를 닮은 그 인물을 참 따뜻하게도 그려준다. 나보다 못한 이들을 보며 느낀 '안도'와 '우월'을 어느 순간 자각했을 때 느껴지는 그 당황스러움을 작가는 부도덕함에서 오는 위선이 아니라, 변해버린 사회가 주는 어쩔 수 없는 흔적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김애란 소설 속 인물들을 완벽하게 선하다고도 악하다고도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 없다. 조금씩의 불완전함을 가진 인물들에게 보내는 김애란의 시선이 내가 이 소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모두가 완전함을 이야기할 때, 불완전한 우리를 위해서 묵묵히 안녕을 빌어주며 '마치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오늘, 이웃 간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그 작은 연대와 환대를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