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또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빨간 주단 위로 캐럴마저 깔리지 않아 담채의 연말 거리 풍경이 되었고요. 이에 아랑곳 하지 않은 사람들이 옷자락 나부끼며 잰걸음으로 쏠려 나옵니다. 섣달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바빴던 일상도 잠시 내려놓고, 소홀했던 주변을 돌아보며 그에 상응한 선물꾸러미를 장만하려는 움직임이겠지요. 저도 그 무리 속에 끼어 모임을 빙자한 북촌나들이를 했습니다. 예쁘고 기발한 진열장 내 아이디어 상품들로부터 눈길을 외면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럼과 동시에 그 번화가에서는 마주치는 일이 생겨나는데요. 특정 종교인들이 일방통행 식으로 다가와 강요 섞인 선교활동과 부닥뜨려야 하는 일이지요. 얼마나 자신의 종교에 확신이 섰으면 그러겠나 싶기도 했지만, 무례한 가해로 느껴져 불편함을 숨길 수 없습니다. 세상은 다양한 가치와 경이로운 존재들로 진보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거리에서는 ‘구세군 자선냄비’가 스쳐가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민망을 안깁니다. 종교가 있고 없음을 떠나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순백으로 되돌려놓는 마술을 부립니다. 살기에 바빠 잠겨 놓았던 선행을 불러내는 순간입니다. 그러고 나면 어느 새인가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이 저마다의 식구처럼 그들 안에 녹아듭니다. 이 세상에서 줄곧 선하게 살기란 쉬운 일인가요. 착하게 살고자 하는 길은 세상에서 손해 입을 각오에 뒷걸음질 하지 않고, 바보란 소리를 기꺼이 들을 용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길이야말로 ‘나’가 이 거친 세상에서 결코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유일한 동행임을 단언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요즘 하게 된 생각인데요, 참살이의 근원인 종교가 온누리에 끼치는 영향을 되짚어 보는 일입니다. ‘가자지구’에서 이어지는 참상 때문이지요.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인구는 압도적인데 그들의 기도는 과연 어디를 향해 있는 걸까요. 다른 배경을 지닌 저에게도 참 종교인이란 무릇 형상만을 좇지 않으며 그 안에 머물지 않고, 삶을 관통해 득의한 옥석 같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 그들의 진면모라 생각합니다. 지금껏 지닌 재물까지 본래 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 나눔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그러니 종교를 지니지 않았다 한들 어떻습니까. 선한 의지로 깨달음의 실천이 보인다면 그것이 실제 생명이 깃든 선교 행위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도 얼키설키 보이지 않게 연결시켜주는 벼리와 같습니다. 이 같이 서로 존중하고 받드는 마음이야말로 종교의 근본적 가르침이 아닐까 하고요. 그런데 가자지구에서 자행되는 이 전쟁이야말로 이 같은 가르침을 뒤엎는 난센스가 아닐 수 없는 겁니다.
160여 년 전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던’ 수승한 최제우 교주의 가르침, 동학이 일어났습니다. ‘하늘과 땅 사람은 모두 한울의 이치 기운으로 하나입니다. 사람은 바로 한울덩어리고, 만물이 다 한울의 정기로 생긴 것입니다.’ 천지인(天地人) 사상의 첫 대목입니다. 여기서 한울님은 전지전능한 천상의 하느님을 지칭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태곳적 평등사상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며 가르침을 준 한울님 사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주목할 점은 우리 동학에서는 선과 악을 나누거나 규정해 심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금 ‘가자지구’의 전쟁 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들 편에 유리한 주장을 펴서 상대를 제압하려는데 있지 않나 싶습니다. 선과 악의 대상을 그들 마음대로 찍어낸 유불리 규정인 셈이지요. 평화가 멀어 보이는 이 전쟁의 끝은 어디쯤일까요. 무모한 민간인들의 주검만이 늘어나는 작금의 현상입니다.
오래전 외래사상에 지배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가 토박이 동학을 만나 뛸 듯이 기뻤습니다. 더불어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도 접할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뛰어난 사상가를 나는 왜 이제야 접하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체력 떨어진 늙은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게라도 만났기에 안도했습니다. 반성합니다. 우리는 왜 서양문화에 주눅이 들고 무작정 그들을 추종해 왔을까요. 뭔가 그들의 것이라면 선진문명일 것이며 그럴듯한 멋진 세상에 도달할거란 기대로 남보다 앞서 서양문물을 향해 배움의 욕망을 키워오지 않았나요. 우리의 것은 구닥다리로 치부해 팽겨진 채로. 한참을 지나쳐 온 지금이지만 세계 평화의 시금석은 동학 같은 동양사상에 담겨 있음을 우리가 자부해도 좋습니다. 세계인들이 평화 유지를 위해서라도 동양에 눈을 돌릴 때라고 말입니다. 동시에 지구를 살리는 유일한 동양의 지략 철학관까지.
이 글을 마무리하는 중에 위 속앓이로 며칠을 건너뛰었습니다. 날이 무척 차갑습니다. 이럴 때 마음에 따뜻한 군불을 집혀 확장된 가족 안으로 소외된 이웃까지 품어 덥혀주시기를.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은 ‘하늘이 내 마음 속에 있음이 마치 씨앗의 생명이 씨앗 속에 있음과 같으니, 씨앗을 땅에 심어 그 생명을 기르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은 도에 의하여 하늘을 기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아름다운 생각의 씨앗을 순간순간 심고 난 후에 잊고 있어도 언젠가는 꽃다운 존재로 피어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살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많이 내 일으켜 보세요. 마음에 차곡차곡 저축하듯이. 전쟁 없는 세계 평화유지와 내 안의 평화까지 불러내도록. 불교에서 이르는 지각작용을 움직이게 하는 심층의식인 ‘아뢰야식’과 일맥상통함을 이에 첨부하면서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