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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영 Dec 31. 2023

방금 단장된 연말 풍경

  연말임을 잠시 실감했습니다. 한동안 뜸했었던 지인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으니까요. 문자가 아닌 육성이 담긴 말들이 오가며 환한 꽃말들을 피워냈습니다. 그들에게 아직 챙길만한 존재로 남겨진 모양입니다. 그런데요 지난 날 어떤 이에게 보낸 관심이 일방통행에 그치며 내밀었던 손에 힘이 빠져 민망했던 일도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럴 땐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하고 쿨하게 돌아서면 그만이었습니다. 그 일에 밀착해 확대 해석하려 들거나, 불편한 감정에 자신을 가두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니까요.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고 저지르는(타자와 무관한) 업식(業識)에 따라 벌어질 상황도 실제 하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살 날 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 보니, 쓸모의 여부가 존재의 중량감으로 둔갑해 저들의 저울질에 출렁일 날도 많아질 테죠. 씁쓸함에 몰리기 쉬운 노년이지만, 관심 받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노심초사는 단번에 걷어찰 일입니다. 생애 끝머리에 가까워진 이때, 노인존재의 당위성을 구축할 시간도 모자랄 판국이니까요. 


  연말에는 조촐하게 치러지는 자축행사가 내게 있습니다. 올해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고 감사했던 인물들을 가슴 속에 모셔와 조촐한 선물을 마련하는 행사입니다. 이를테면 ‘올해의 10대 성과와 인물’ 선정과 같은 것이죠. 그렇게 12월은 ‘감사’의 느낌표로 오롯이 보내는 편입니다. 그와 점철된 시간과 인물을 소환하는 건 당연하고요. 그러려고 웬만해서는 연말 약속을 잡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나만의 시간을 마음껏 누릴 일상이 널려있음에 제 두 손이 모아졌고. 알게 모르게 펼쳐질 일과를 혼자의 힘으로 해냄을 확인했을 때. 무엇보다 다양한 분야의 글 속에서 결이 같은 길벗을 만났을 때. 따를만한 스승을 만나 동반되는 환희심까지. 이 늙은이에게 끊임없는 정신세계로의 질주를 멈출 수 없는 열망까지 지녔음도 무슨 복인가 싶습니다. 홀로 살면서 주변머리가 넉넉해질 무렵 주위를 돌아볼 여유까지 생겨났던 겁니다. 


  ‘감사’의 주인공을 불러내려면 따뜻하게 마음을 데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나오게 되어있어요. 잡다한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그들의 참모습에 다가갈 수 없거든요. 휙 돌아보니 감사한 주변 인물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주문만 했는데 집 앞까지 떡하니 배달해준 택배기사. 새벽녘 현관문을 열면 어김없이 놓인 신문 사이로 흔적 없이 사라진 배달 아주머니. 정직한 재료와 손맛의 풍미로서 고객에게 행복한 만복감을 채워준 양심가게 주인. 어지럽게 널린 동네골목길 쓰레기를 주워 깨끗함으로 되돌려 준 일은 노인일자리 마크가 선명한 어르신들의 배려 섞인 손길에서 나옵니다. 개중에는 다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나, 그렇다 치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염두에 둔 ‘얼’이 깃든 ‘얼골’들의 공공선이란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버는 돈의 이익이 자신에 그치지 않고 이웃의 이익으로까지 무한 전개된다면 이 사회에 공명을 일으키게 되어있죠. 그래야만 정직한 돈벌이로 이어질 테고 나아가 건강한 사회일원으로서 거듭나는 일이 되겠지요.  


  뭐니 뭐니 해도 맹위 떨치는 이 겨울철, 손 모아 고마워 해야 할 분들은 재활용 담당 환경미화원일 것입니다. 차가운 날씨와 잦은 미세먼지 아래서 묵묵히 일하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적은 보수에다 냄새 나는 궂은일을 자신들 일처럼 하루 종일 바깥에서 작업하는 일이 쉬운 일일까요. 추위에 노출된 몸을 잠시 녹일 공간도 확보해주지 않은 아래서 바쁜 손놀림만 도드라져 보입니다. 접혀 버려야 하는 박스를 나 몰라라 완전체로 버리고 가는 주민, 음식물로 오염된 플라스틱 그릇을 재활용포대에 툭 던지고 가는 주민 등등. 이후에 미화원의 손길이 그 위에 포개지면서 추가 소환되는 그들의 노동을 바라보며 제 마음이 구겨지곤 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청소기계차가 거두어갈 때까지 실제 그들의 작업은 이틀에 걸쳐 있습니다. ‘1박 2일’ 예능프로그램처럼 고된 육체가 따르는 건 같아도 예능인의 인기와는 거리가 먼 무관심만 남겨집니다. 그런 그들에게 연말이면 격려 차 중식배달을 제공했습니다만, 올해에는 메뉴가 바뀐 치킨으로 그들의 노고를 찬탄했습니다.  


  높은 곳을 향해 바라보던 습관을 지니다 보니, 연말을 기점으로 발아래서 잃어가는 빛을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는 역시 저 아래에 도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르니까요. 어쩜 노년기야말로 그 자리로 이동해가는 시기가 아닐까요. 누구나 늙어갈 테니 우린 모두 같은  공동운명체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맹렬한 기세에 휩쓸려 상실의 시대를 지나치고 있는 중입니다. 아 그런 이번에는 이런 일이. 상실 그 빈자리에 스민 다른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상실을 잃어갈수록, 많이 비워낼수록 오히려 그 빈자리에 새로움이 싹트는 희망이 자라나는 것임을요. 인도의 철학자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며 상호연관되어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 것이 공허(空)라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고유하는 실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형성될 뿐이라는 것이죠. 

  주변 그분들의 활동 덕분에 우리가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과의 연결된 관계망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뤄 ‘나’와 귀결시켜 주었음에 감사하라고. 위의 열거한 모든 분들께 이 연말을 빌미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한 이 계기로 ‘얼’이 깃든 ‘얼골’을 마음에 되새기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이로써 새로운 치장으로 방금 단장된 저의 연말풍경을 소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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