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해왔던 영화, ⌜소풍⌟을 봤습니다. 유의미한 노인 셋이 등장합니다. 뜻하지 않은 귀향으로 길 위에서 벌어지는 옛 동무들과의 빛나는 재회.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죽음이 담긴 한 폭의 그림같습니다. 헌신한 존재로 각인된 노인들에게 찾아든 늘그막의 여유로움을 그들 자신은 어떻게 풀어갔을지 자못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차마 예견하지 못했는데 들이닥친 가족사의 실타래 매듭을 어떻게 풀어낼지 흥미를 자아냈습니다. 소문만큼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이 당면한 현실에 드리워진 어두운 장막을 밀쳐내고 승화된 모습으로 주위를 환히 밝혔다는 점이 남다릅니다. 지천으로 널릴 만한 노년의 현실을 객관적이며 진취적인 방식으로 다룬 카메라 앵글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노인들이지만 범상치 않은 체취로 관객을 사로잡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흘리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그 무게감을 털어낸 그들의 명쾌한 반란이 시작된 것이죠. 노인 이미지 쇄신에 선두주자인 그들의 그 한 방이 참으로 명징하게 다가왔으니까요.
낮잠에서 깬 ‘은심(나문희)’이 한 움큼의 약을 복용하는 첫 화면은 노인세대라면 낯설지 않습니다. 꿈에서 죽은 어머니가 자주 보인다는 ‘은심’의 말을 끼워 넣어 머지않은 죽음을 암시한 감독의 개입도 엿보입니다. 이어서 사업실패로 벌거숭이가 된 아들의 등장에 관객들 얼굴이 구겨집니다. 내 또래들과 자주 나누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자식인 너희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테니 ‘너희’도 이 늙은 부모에게 손 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제’ 앞가림만 잘 해도 효자로 등극하는 요즘 세상입니다. 뜻하지 않은 아들 식구들 급습에 ‘은심’은 일절 반응하지 않고 선회하며 자신의 귀환으로 조용한 준비를 시작합니다. 홀연한 귀향 결정은 16세에 떠나 60년 만에 이룬 동무들과의 해후를 맞습니다. 그 곳에서 펼치는 친구들의 재발견은 서로에게 기댈 벽이 되어주며 안정감과 훈훈함으로 전개됩니다. ‘은심’의 용단 아래 펼쳐진 그 여로에서는 허물없는 대화가 물 흐르듯 했고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습니다. 저 나이에 저토록 깔끔한 판단으로 주변의 신상 문제를 털어낼 수 있다니. 영화의 마무리는 외면하고픈 죽음을 건드렸지만 무겁기커녕 되레 가벼운 존재감으로서 대미를 장식합니다. 갑작스런 ‘태호(박근형)’의 부음에 잇달아 ‘은심’과 ‘금순(김영옥)’은 지독한 결심을 감행하게 되지요.
마지막일지 모를 ‘소풍’길에 둘은 나서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변을 과감히 정리하는 과정을 찬찬히 밟습니다. 은심은 서울의 집을 팔아 며느리에게, 금순은 시골집을 쓸고 닦아 말끔히 정돈한 뒤 남겨진 통장을 말썽쟁이 아들에게 넘기고는. 둘은 옷가게에서 미리 장만한 고운 옷(눈시울이 붉혀졌습니다. 내 어머니 역시 눈을 감기 얼마 전, 집 부근의 가게에서 옷을 한 아름 사왔던 일이 연상되었으니까요)으로 갈아입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소풍 길 따라 인접한 산 정상에 오릅니다. 아름다운 옷자락 실루엣이 바람에 펄럭이며. 정상을 향해 높이 솟은 하늘 아래서 환한 모습의 둘은 서로의 우정을 확인한 순간을 또 맞습니다. 여기서 ‘소풍’이란 현생이 아닌 저 너머의 생을 대변하는 것이겠지요. 바로 죽음의 세계로 말입니다. 감정에 치달을 수 있는 현실 상황을 비켜서서 일거수일투족 시립도록 정리한 저 두 노년의 이성이 한껏 도드라진 작품입니다. ‘노년의 사회적 문제, 노년의 길 위에서 묻다’라는 질문이 관객을 향해 쏟아져 나올 듯싶습니다. 이와 연상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16년도 드라마 히트작, ‘디어 마이프렌즈’입니다. 초로에 진입한 여자 넷의 청춘들이 모색해 이룬 성과, 또 다른 ‘길 위의 여행’입니다. 항암 치료 중인 한 친구를 이끌고 바닷가로 함께 떠나자는 제의로 시작된 일입니다. 실내에서 속절없는 죽음을 맞느니 차라리 친구들과 동승한 ‘길 위의 죽음’을 맞겠다는 결의가 압권입니다. ‘노년의 길’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줄이려는 의지가 돋보인 순간이지요.
그런데요, 아쉬운 점이 있어 이 영화의 언저리를 돌아보게 하는군요. 주연배우들(나문희 김영옥 박근형)의 실제 평균 나이는 만84세. 영화 속의 설정된 나이는 이보다 젊은 만76세인데, 올 내 나이와 똑같은 점이 예사롭지 않아 나름의 심경을 정리해 봤습니다.
첫 번째. 70대의 체력은 80대 보다 상대적으로 건강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보편적인 기준에서 그렇다는 말이지요. 영화 속 금순이가 ‘그 날’밤 골 다공으로 허리를 못 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평소 성인 기저귀를 구비해 놓고 그 일을 대비해 소변을 해결해왔던 모양입니다. ‘그 날’은 곁에 누운 은심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은심의 둔한 내조로 소변을 지리고 말아 실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제 주변 70대에서는 들을 수 없던 내용입니다(실금은 예외). 만약 실제 배우들 나이 80대를 그대로 적용했더라면 그 흐름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70대 노화 상태를 80대인 실제 배우와 차별화하지 않고 엇비슷한 설정으로 무리하게 몰고 갔다는 점. 이로써 70대 노화에 대한 실정 왜곡을 불러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두 번째. 100세시대인 요즘, 만 76세 노인의 죽음을 조기에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노인의 유산을 가족에게 남긴 사례로 더해졌습니다. 가족중심의 사고가 작금의 사회상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진데, 유산의 일부라도 사회에 환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품어준 따뜻한 우정과 여러 갈래로 얽힌 고향의 내음은 앞으로 쉽게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세대의 고향은 이미 무너져가고 있고 그 안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사라질 테니까요. 언젠가는 이런 이야기가 박제되어 옛 이야기처럼 박물관에 걸릴 날도 오겠지요. 그런 이유로 이 한 편의 영화를 귀하게 보듬게 되는 이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