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좌의 한 도반이 도발적인 질문을 날렸습니다. “여행 중에 갈비 한 점 먹었잖아요. 돌아와서 고기를 먹지 않았나요?” 그때의 고기 한 점이 채식주의자인 나의 식습관에 교란을 안겼는지 궁금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내 집 밥상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단지 외출로 식사를 같이 할 상대가 있거나 단체 여행에서 그때그때 분위기를 헤아려 채식만을 고수하지 않던 유연함을 보였던 일입니다. 이처럼 바깥 활동 중에 두드러진 채식을 고집하지 않으려는 내 의지가 발현될 때가 종종 있어요. 예상대로 중국여행에서 차려나온 음식의 대부분은 기름진 육류 위주였습니다. 이에 대비해서 준비해 간 몇몇 밑반찬을 합석한 중국 특유의 둥근 턴테이블마다 내놓았지만 무색한 일로 거두고 말았습니다. 육식은 삼갔으되 조리된 다른 음식에 섞여 나온 채소와 생선으로 뱃속을 채우다시피 했으니까요.
채식밥상의 이력은 중년 이후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원래 육류에 빠질 정도의 입맛도 아니었지만 종교적 배경이 작용했음을 숨기지 않겠습니다. 게다가 나이 들어가면서 지구 환경을 걱정하게 되었고 동물에 대한 윤리적 가치에 관심이 꽂히다 보니 더 확고해지더군요. 요즘 사람들은 건강하기 위해 채식을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채식인구는 꾸준히 늘었다고 하는데 채식하는 이들을 거리에서 마주치기 쉽지 않습니다. 외국의 비건처럼 여느 음식점이든 거리낌 없이 주문할 수 있는 대중화된 모습이 우리에겐 먼 일 같거든요. 채식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남아있고 육류 단백질만 강요하려는 사회흐름도 이에 가세하고 있습니다(식물성분에도 단백질이 들어 있음을 간과하고 있음). 무엇보다 가깝지 않은 채식전문점을 찾아 나서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고요. 이에 걸맞은 배움터가 있어 망설임 없이 채식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합류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갈망해왔던 전통 채식의 배움터 ‘사찰음식’을 만난 겁니다.
사찰에서는 ‘식사’라 하지 않고 ‘공양’이라는 말을 합니다. 공양(供養)이란 말 그대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윗사람에게 음식과 옷 재물 등을 바친다는 의미로서 산스크리트어에서 전래되었어요. 공양에는 단순 먹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어떤 마음자세로 음식을 대하느냐에 따른 의미가 더 함축돼 있습니다. 음식이 입 안에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농부들의 피와 땀으로 점철된 손길을 되새김하자는 뜻이죠. 감사한 마음을 되돌리는 의례가 공양의 첫 번째 관문이요. 뒤따른 일은 먹거리의 모든 생명에 대한 소원해질 마음을 경계하며 소비하듯 먹어치울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혜택에 감화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지요. 그런 공양의 배움을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이제 내 손 안에 전통 식재료가 담길 생각을 하니 설렘으로 한껏 부픈 마음입니다. 각종 양념에 절어 혀의 감각을 충동질하는 세상맛이 아닌 우리고유의 순한 맛과의 대면이라니.
어느 샌가 민속 최대의 명절 한가위가 바로 코앞입니다. 오늘 자 신문의 첫 화보는 “보름달 보다 환한... 내 새끼 왔구나!”로 장식했습니다. 기차에서 막 내린 귀여운 손주 녀석을 반기는 할배의 뒷모습이 실로 정겹습니다. 이런 정경과는 별개로 아예 명절이 없으면 좋겠다는 집도 적지 않습니다. 명절 날 빚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 때문이겠지요. 온가족이 모여 송편을 빚으며 음식을 나눠먹고 즐기는 명절은 점점 사그라지는 추세라 하지요. 여러 날에 걸친 명절을 빌미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이를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명절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고 차례 상마저 기획된 물품 구매로 선회하려는 현상이 도드라졌습니다. 이로써 집집마다 전래되었던 손맛의 퇴보로 이어질 일은 빤해졌지요. 바쁜 현대인들에게 어쩔 도리 없는 상황일 테지만 몇몇 손맛이나마 지켜내려는 노력 또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 그런 배경 하에 ‘사찰음식’을 배우기로 한 일은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도 될 성싶습니다.
가족을 이루지 않은 집에도 한가위는 찾아듭니다. 인공 빛에 가려져 존재감을 잃어가는 도심의 달빛입니다. 어둑어둑한 밤에 일부러 창밖을 내어다보니 하늘에 걸린 달은 무심하나 둥글게 차오르고 있더군요. 10여년 넘도록 살았던 전원생활의 추억을 꺼내듭니다. 휘영청한 달밤에 교교한 달빛을 온몸으로 쏘이며 거닐었던 그때의 감동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창가 깊숙이 스며든 달빛의 오묘함에 젖어 잠들었던 일은 꿈만 같습니다. 그러면서 뚱딴지같은 생각을 키워냈습니다. 사찰음식의 배움 뒤에 신개념의 내 가족을 명절 안팎으로 초대할 꿈을 꿈꾸는 일이지요. 그 결심이 무색해지지 않으려 주변에 이미 공표해 두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밥을 같이 먹는 의례 그것도 정성 가득한 사찰음식을 제공한 자리가 서로에게 각별한 느낌을 주고받으리란 확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순간의 힘이 모여져 우리 삶의 윤활유로서 작용할 것이라고. 실제 우리는 감각적 쾌락으로 음식을 섭취하고 있습니다. 맛의 촉감으로 행복을 다스려는 일이 다반사죠. 단지 음식을 맛으로 갈라쳐 맛있는 것은 마냥 취하고 그렇지 않은 음식은 쉽게 버리는 일. 음식에 대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가짐이 사라진 자리에는 탐닉만이 움틀 뿐입니다. 이 점을 쇄신시켜 우리에게 새로운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운동이 바로 ‘사찰음식’의 기본정신이라는 것이죠. 지금 겪고 있는 환경위기의 대안으로 떠올랐다는 점도 덧붙이면서.
한가위 날 만은 바쁘고 귀찮더라도 내 손으로 정성스레 빚은 한 가지 이상의 음식을 장만하기를. 이로써 나눌 수 있는 추억꺼리가 되어 서로에게 살만한 삶으로 기록되기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