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임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한동안 뜸했던 지인들의 전화나 문자가 밀려들기 시작했으니까요. 문자 보다 육성의 전화가 오는 것을 더 반기고 있습니다. 환한 꽃말들을 피워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아직 챙길만한 존재로 남아 있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어떤 이에게 보낸 관심이 무반응에 그쳐, 내밀었던 내 마음이 쪼그라든 적도 더러 있더군요. 그럴 때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다라고 쿨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그 점에 집착해 확대 해석하려 들거나, 불편한 감정에 자신을 가둬놓는 일은 어리석은 결과를 낳습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모르고 저지르는(타자와 무관한) 또는 자신의 업식(業識)에 따라 일어난 상황은 의외로 많아, 나와 연관된 일이 아닐 수 있거든요. 이제 살날보다 죽을 날에 더 가깝다 보니, 세상의 쓸모 여부로 마음을 저울질하지 않기로 한 지 오랩니다. 씁쓸함에 몰리기 쉬운 노년이지만, 관심받지 못할까 걱정하는 노심초사는 단번에 걷어찰 일이라고요. 생애 끝자리에 가까워진 때, 노인 존재의 당위성을 구축할 시간마저 모자랄 판국이니까요.
이런 연말과 함께 조촐하게 치루는 자축행사가 내게 있습니다. 올해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고 감사했던 인물들을 떠올려 조촐한 선물을 마련하는 일인데요. 이를테면 ‘올해 일의 성과와 인물’을 선정하는 일이죠. 그렇게 12월은 ‘감사’의 느낌표로 오롯이 보내는 편입니다. 그와 점철된 시간과 인물들을 소환하는 건 당연하고요.
그러려고 웬만하면 연말 약속은 잡지 않는 편입니다. ‘감사’의 주인공을 불러내려면 따뜻하게 데워진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나오게 되어있어요. 잡다한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그 참모습에 다가갈 수 없거든요. 휙 돌아보면 감사한 주변 인물들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주문만 했는데 집 앞까지 떡하니 배달해준 택배기사. 새벽녘 현관문을 열면 어김없이 놓인 신문 사이로 흔적 없이 사라진 배달 아주머니. 정직한 재료와 손맛의 풍미로서 고객에게 행복한 만복감을 채워준 양심가게 주인. 듬성듬성 쓰레기가 널린 동네 골목길을 청결함으로 되돌려 준 일은 노인일자리 마크가 선명한 노인들의 손길이었음을.
개중에는 다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냐 반문하는 이가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공공의 이익을 염두에 둔 ‘얼’이 깃든 ‘얼골’들의 공공선 활동이 아니냐는 말로 되묻고 싶습니다. 내가 버는 돈의 이익이 자신에 그치지 않고 이웃의 이익으로까지 무한 전개된다면, 이 사회에 공명 현상을 일으키게 되어있죠. 그래야만 정직한 돈벌이로서 당당해질 테고 건강한 사회일원으로서 거듭나지 않을까요.
뭐니 뭐니 해도 맹위 떨치는 겨울철에 손꼽아 고마워해야 할 분들은 재활용 담당 환경미화원일 것입니다. 차가운 날씨와 잦은 미세먼지 아래서 묵묵히 일하는 그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적은 보수에 냄새나는 궂은일을 자신들의 일처럼 하루 종일 바깥에서 작업하는 일이 쉬운 일일까요. 추위에 노출된 몸을 잠시 녹일 공간도 확보되지 않은 아래서 바쁜 손놀림만 도드라져 보입니다.
접혀서 버려야 하는 박스를 나 몰라라 완전체로 버리고 가는 주민, 음식물로 오염된 플라스틱 빈 그릇을 재활용포대에 툭 던지고 가는 주민 등등. 그 위에 추가 소환되는 미화원의 손길을 바라보며 구겨진 제 마음을 쑤셔 넣곤 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청소기계차가 거둬갈 때까지 그들의 작업은 이틀간에 걸쳐서 하지요.
그런 그들의 노고를 격려하고자 따뜻한 음식 한 끼를 대접하는 일이 나의 연말행사가 되었던 겁니다. 양지로 치달으려는 마음을 잠시 붙들어 매 놓고, 음지에서 묵묵히 일하는 분들을 이리 재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주변머리가 넉넉해진 솔로로 살면서 주위를 돌아볼 여유까지 이렇게 생겨났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