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正常인가?

by 시온

우리는 세상을 둘로 나누어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정상과 비정상. 이런 구분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정리해주는 강력한 틀이다. 학습 초기 단계에서 이분법만큼 효과적인 프레임워크도 드물다. 무수한 동물을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로 나누면 생물학이 갑자기 이해되기 시작하고, 경제를 시장과 정부의 관계로 보면 복잡한 경제 현상이 선명해진다.


문제는 이분법이 설명의 도구를 넘어 세계관으로 확장될 때 시작된다. 막스 베버는 지배가 힘으로 유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배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믿어질 때 지속된다. 그리고 이분법은 바로 그 정당성을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장치였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분법으로 구분된 두 세계는 결코 평등하게 공존하지 않았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서양과 동양, 백인과 유색인. 이렇게 둘로 나뉜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우열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우월한 것으로 규정된 쪽은 열등한 것을 지배하는 당위성을 얻었다. 실제로 중세부터 근대까지 기독교를 믿는 서양 백인 중산층 남성이 세상의 주인이었고, 그가 아닌 것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선하다고 부를 수 있는 자가 있었을 뿐이라고. 이 통찰은 이분법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우월과 열등은 객관적으로 발견된 속성이 아니다. 먼저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이 만들어지고, 그다음에 우월과 열등이라는 가치 판단이 덧씌워진 것이다.


이 과정을 단계별로 보면 더 명확해진다. 기득권 집단은 우선 자신들의 특징을 '정상', '보편', '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한다. 이 단계에는 아직 노골적인 우열 판단이 없다. 그저 '자신들스러움'의 설정일 뿐이다. 그런 다음 그와 다른 것들은 '다른 것', '이상한 것'으로 분리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분이 사회 제도, 언어, 교육, 법 속에 고정되면, 비로소 우월과 열등이라는 가치 판단이 끼워 맞춰진다. 즉 우월성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가장 교묘한 부분은 여기서 발생한다. 열등하다고 규정된 집단이 차별받는 현실은 "차별해서 그렇다"가 아니라 "열등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설명으로 뒤집힌다. 가장 완벽한 지배는 지배당하는 자가 그것을 지배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이루어진다. 이분법은 폭력을 숨기는 언어가 되고, 지배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분법을 전면 거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분법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성과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는 효율, 성과, 목표 달성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며, 이를 인정하는 것은 필요하다.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의 구분은 측정 가능한 영역에서는 의미가 있다. 문제는 그 차이를 세상 전체에 들이대는 순간이다. 성과의 차이를 인간 가치의 차이로, 효율의 우열을 바른 것과 틀린 것으로 번역하는 순간, 이분법은 도구에서 폭력으로 전환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라치기의 본질도 여기에 있다. 갈라치기는 단순한 분열이 아니라 차이를 위계로 고정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 위계는 대체로 성과, 효율, 정상성의 언어를 빌려 정당화된다. 성과의 차이는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사실을 가치 판단으로 오염시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중세와 근대의 폭력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AI 대전환 시대는 이 오래된 문제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증폭시킨다. 2025년, 전 세계 조직의 78%가 이미 AI를 도입했다. 채용 결정, 대출 심사, 의료 진단에 AI가 활용된다. 문제는 과거에 기득권이 수동적으로 '자신들스러움'을 표준화했다면, 이제는 AI가 그 표준을 학습하고, 자동화하고, 전 세계로 확산시킨다는 점이다.


AI는 과거 데이터로 학습한다. 채용 AI가 과거 합격자 데이터를 학습하는데, 그들이 대부분 특정 대학 출신이었다면? AI는 그것을 '성공 패턴'으로 인식한다. 대출 AI가 과거 상환 이력을 학습하는데, 애초에 대출 기회조차 받지 못했던 집단은 데이터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학습될 수 없고, 학습되지 않은 것은 영원히 배제된다. 과거의 편향은 알고리즘 안에서 '데이터 기반', '객관적', '합리적' 판단이 된다.


더 교묘한 것은 이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편견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비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AI의 결정은 블랙박스 안에 숨어있다. 단지 '알고리즘이 그렇게 판단했다'는 말만 남는다.


AI 시대에도 이분법은 사용해야 할 도구이지, 살아야 할 세계관이 아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AI가 학습하는 '정상'이 누구의 정상인지, AI가 최적화하는 '성공'이 누구의 성공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AI 대전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알고리즘 안에 누구의 '자신들스러움'이 표준으로 고정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눈이다. 효율을 인정하되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 것, 성과를 측정하되 그 사람 자체를 평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분법의 시대를 넘어, AI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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