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부산영화제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우리 회사가 한국 영화를 빛낸 감독님들의 노고를 기리는 취지의 행사를 후원하게 되어, 나는 회사 대표로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 젊은 감독님들께서 선배들의 공적을 치하하자는 취지의 기획안을 제출하였고, 그 당시 영화가 타겟 고객들의 최애 문화였기에 회사는 흔쾌히 예산을 지원하였다.
평소 일에 치여 옷차림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스탠딩 파티도 있다기에 잘 다린 와이셔츠를 챙겨 입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어색한 스탠딩 와인 파티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던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나는 헤드 테이블에 배정 받았고, 각 좌석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장관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부처 장관이 참석하신가 싶어 두리번거렸는데, 알고 보니 우리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분을 부르는 소리였다. 영화감독으로 일하시다가 공직에 나가 장관을 지내신 분이었다. 그분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 호칭을 자연스럽게, 어쩌면 즐기듯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격식과 거리가 멀 것 같던 영화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중에 회사일로 급한 전화가 왔다. 자리를 비워 통화를 마치고 돌아왔더니, 내 자리에 유명한 또 다른 감독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다른 분과 대화 중이셨기에 나는 자리 옆에서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다. 2~3분쯤 지났을까, 같은 테이블에 앉아 계시던 다른 분이 내 자리에 앉아 계신 감독님께 말했다. "그 자리 원래 주인이 잠시 일을 보시고 돌아 오셨네요."
그 말을 들은 유명 감독님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10여 초가 흘렀다. 그 시선 속에는 명확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그 짧은 시간이 정말로 길게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주최 측에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10년쯤 지나 우리 회사에서 작은 영화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기획 회의에서 누군가 그 유명 감독님을 심사위원장으로 모시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반대했다. 틀어진 인성으로는 좋은 영화를 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라는 게 결국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인간의 희로애락, 인간 삶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스크린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눈앞의 사람을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날 나를 불편하게 만든 건 단순히 한 개인의 오만함이 아니었다. 그런 태도를 자연스럽게 용인하는, 권위를 앞세우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분위기였다. 스크린 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스크린 밖에서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표리부동함. 그것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하나의 기준을 남겼다. 아무리 유명한 작품을 만들어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 그리고 그 진짜 모습이 결국 그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에 스며든다는 것.
영화계에서 유명해진 사람이, 사람 냄새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