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과 인공지능, 블록체인 같은 기술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중간 단계를 없애겠다’고 말했다. 비싸고 복잡한 유통 구조, 불투명한 수수료, 불필요한 중개자들을 기술이 대신 정리해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은행 없이 대출을 가능하게 하는 디파이(DeFi), 부동산 중개업자 없이 집을 찾을 수 있는 플랫폼, 작가가 출판사 없이 전자책을 올릴 수 있는 서비스까지. 이런 변화는 실제로 거래 비용을 줄이고, 투명성을 높였다. 기술이 세상을 더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상은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중개자가 사라진 자리를 ‘더 큰 중개자’가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작은 유통상이나 중소 중개인이 사라지고, 그 대신 아마존 마켓플레이스, eBay, 네이버 쇼핑과 같은 대형 온라인 플랫폼이 들어섰다. 겉으로는 ‘탈중개화’였지만, 실제로는 ‘재중개화’, 즉 새로운 중개 구조의 탄생이었다. 기술이 중개자를 없앤 게 아니라, 모든 길을 한 군데로 모으는 초중개자를 만들어낸 셈이다.
문제는 이 새로운 중개자가 너무 강력하다는 데 있다. 플랫폼은 막대한 자본력과 데이터, 그리고 네트워크 효과를 무기로 삼는다. 소비자들이 한곳에 모이면, 판매자들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경쟁 플랫폼이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이미 이용자와 거래 데이터가 집중된 플랫폼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이런 독점 구조는 ‘공정한 경쟁’ 대신 ‘독점 임대료’를 낳는다. 빅테크는 혁신의 대가가 아니라, 시장 지배의 대가로 과도한 수익을 얻는다.
그렇다고 “수수료를 없애자”는 단순한 주장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료 서비스’가 아니라, 혁신이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보상받는 ‘건실한 마진 구조’다. 이윤이 나야 투자도 이어지고, 좋은 서비스도 나온다. 문제는 누가 얼마만큼 가져가느냐의 공정성이다.
이런 고민이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분야가 한국의 농수축산물 시장이다. 아직 공영 도매시장과 지역 농협, 중소 물류업체가 핵심 유통 축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 구조가 점점 플랫폼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겠다는 온라인 거래 플랫폼이 빠르게 늘고 있고, 네이버 쇼핑이나 마켓컬리 같은 대형 사업자가 결제·데이터·마케팅을 아우르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완전한 독점 상태는 아니지만, 이들이 거래 데이터를 축적하고 가격 형성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전통 유통망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자본과 기술, 그리고 데이터 인프라를 가진 플랫폼이 시장 구조의 주도권을 가져가는 추세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 개별 농어민이 거대 자본을 이길 수는 없지만, 공공과 민간, 그리고 생산자 단체가 함께 나선다면 공정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른바 ‘공공-민간 연합형 공정 플랫폼’이 그 대안이다. 정부는 제도를 설계하고, 민간 IT기업은 기술을 제공하며, 생산자는 감시자이자 참여자로 나선다. 이런 삼자 거버넌스 구조라면, 누구 하나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기 어렵다.
기술도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거래 내역과 수수료 구조를 모두 기록해 누구나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스마트 계약은 자동으로 거래 대금을 분배해, 플랫폼 운영자가 임의로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든다. 정부가 공정 수수료 상한선을 설정하거나, 공정 플랫폼 인증제를 도입하면 제도적 신뢰도 확보된다. 나아가 빅테크가 독점한 데이터를 일정 부분 공개하도록 한다면, 중소 플랫폼도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모든 논의의 핵심은 결국 ‘권력의 분산’이다. 진짜 탈중개화는 기술이 중개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중개 권력을 여러 주체가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나누는 것이다. 거래 정보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수익 분배가 자동화로 투명하게 이루어지며, 규칙이 공공적으로 설계된다면, 그 자체로 공정한 시장이 된다.
결국 디지털 시대의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문제다. 빅테크의 독점 구조를 깨는 일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설계하는 일이다. 기술이 권력을 대신할 때가 아니라, 기술이 권력을 분산시킬 때 세상은 진짜로 공정해진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효율뿐 아니라 신뢰와 지속 가능성까지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