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깃발이 되면

by 시온

표현의 자유가 이토록 넓어진 시대가 있었을까? 휴대폰 하나면 전 세계를 향해 언제든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자유로운 공간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고 있다. 2018년 캠브리지 사전에는 노플랫포밍(no-platforming)이라는 단어가 등재됐다. 누군가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말할 기회 자체를 주지 않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들의 신념에 어긋난다 싶으면 공개적으로 지목당하고, 과거 발언이 소환되며, 직장에서조차 압박을 받는다.


이 흐름은 미국 사회에서 선명하게 관찰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원래 차별과 배제를 줄이기 위한 언어적 공정성에서 출발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역사적으로 억눌렸던 집단의 목소리를 복원하자는 선의의 시도였다. 사회 정의 전사(Social Justice Warrior, SJW)라 불리는 사람들 역시 처음에는 그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이 선의가 규범이 되고 진영 싸움의 도구로 굳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정의는 기준이 아니라 진영을 가르는 깃발이 됐고, 옳고 그름은 검증 대상이 아니라 소속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극우는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당신이 어려워진 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이민자와 소수자를 챙기느라 당신을 버린 엘리트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강력했다. 노플랫포밍, 캔슬 컬처(Cancel Culture)는 원래 차별을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실제로는 토론 대신 배제를, 설득 대신 낙인을 선택했다. 그 결과 침묵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불만은 표면 아래로 잠복했다.


극우 커뮤니티에서 가장 흔한 말은 “여기서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였다. 진보 진영이 언어를 규제할수록, 극우 공간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곳처럼 보였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더 심각한 건 양쪽이 서로를 통해 정당성을 얻는다는 점이다. 미국의 진보 진영은 극우를 보며 “더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극우 진영은 진보를 보며 “저들이 당신의 자유를 빼앗는다”고 말한다. 둘 다 상대의 존재 덕분에 더 극단으로 기운다. 가운데는 비어 가고, 양극은 서로를 먹고 자란다.


극단화가 진행되면 의견은 검토 대상이 아니라 정체성의 신호가 된다. 누가 말했느냐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중요해진다. 원래 사회를 완충하던 중간 지대의 사람들은 침묵하거나 편을 골라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렇게 정의가 진영의 깃발이 되고 나면 개인의 설자리는 좁아진다. 깃발 아래 서느냐 아니냐만 남는다. 복잡한 현실은 지워지고 단순한 구호만 반복된다. 적이 없으면 존재 이유가 약해지므로, 끊임없이 새로운 적을 찾게 된다.


공자는 2,500년 전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다.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뜻이다. 차별을 없애려는 마음이 지나치면 억압이 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이 극단화되면 배제가 된다. 주역의 흡도호처(恰到好處)는 양 극의 사이에서 말과 행동이 지극히 적당한 지점을 뜻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과, 상대를 배제하고 낙인찍는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극단은 늘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 말하며 평소 기준을 내려놓으라 한다. 그러나 비상 논리는 언제나 극단의 출발점이다. 정의는 강해질수록 좋은 게 아니라 정확할수록 좋다.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정의의 진영화는 정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의가 적절한 지점을 잃었기 때문이다.진짜 피해를 보는 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조용히 일하고 고민하는 사람들, 극단이 싫어 침묵하는 시민들이다. 사회는 극단이 아니라 중간의 성숙함으로 유지된다. 과한 것은 바른 것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극으로 치닫는 일은, 언제나 여러모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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