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난히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바로 '실용'이다. 정치에서도, 교육에서도, 심지어 인간 관계에서도 실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실용적인 게 최고다", "현실적인 게 맞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들이 당연하게 통용된다. 실용은 이제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자 가치 기준이 된 듯하다.
하지만 잠깐,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이 '실용'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그 실용이 맞는 걸까?
실용주의(Pragmatism)의 본래 얼굴을 들여다보면 의외의 발견이 있다. 이 철학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같은 철학자들이 이끈 이 사조는 단순히 '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가 믿는 생각이나 이론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인간의 삶과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깊이 성찰했다. 특히 존 듀이는 이 철학을 교육과 정치에 적용하면서, 더 나은 시민을 길러내고 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드는 도구로 삼았다.
그런데 이 철학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전인수격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20세기 후반, 미국식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실용주의는 점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공선이나 도덕적 고려는 사라지고, 효율, 속도, 성과, 이익이 모든 것을 재단하는 칼날이 되었다.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은 '무엇이 잘 팔리는가'라는 질문에 밀려났고, '되는 것이 곧 옳다'는 위험한 등식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는 이런 변질된 실용주의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압축 성장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성과 중심의 가치 체계를 體化했고, 실용은 어느새 '성공'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실용주의가 더욱 극단화되고 비틀어졌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실용은 철학적 성찰이나 윤리적 기준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게 이익이 되면 무조건 옳고, 손해가 되면 틀리다'는 식의 편의주의, 자기중심주의에 더 가깝다.
이런 현상은 정치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금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사실 포퓰리즘이나 정책 미비보다도 '우리 편이면 다 괜찮다'는 맹목적 태도다. 같은 행위라도 내 편이 하면 선량한 의도로, 상대편이 하면 사악한 계략으로 해석된다. 불의조차 편 가르기 앞에서는 정당화되고, 원칙은 상황에 따라 휘어진다. 이것이 과연 실용일까? 아니면 실용이라는 이름을 빌린 기회주의일까?
교육 현장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자녀의 전인적 성장을 운운하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 받고,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적을 수 있는 성과와 스펙만이 중요해졌다. 아이들은 점수를 위해 공부하고, 부모들은 순위를 위해 투자한다. 이웃이 어떤 처지에 있든 상관없이, 우리 아이가 한 계단이라도 더 올라가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된다. 이렇게 삶의 기준이 오직 '나의 유리함'에만 맞춰질 때, 사회는 점점 갈라지고 공동체의 윤리는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딜레마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누구는 진부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조심스럽게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떠올려본다. 실학은 흔히 '실용 학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본질은 단순한 실리 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적이고 윤리적인 실천 철학이었다.
정약용을 보자. 그는 《목민심서》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다스림의 근본이다"라고 했다. 관리의 실무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그 출발점이 반드시 백성을 향한 도덕적 책임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박제가 역시 《북학의》에서 이익을 부끄러워하지 말되, 그 이익이 백성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들에게 실용이란 개인의 성취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번영을 위한 지혜였다.
흥미롭게도 이런 실학의 정신은 지금 우리가 겪는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실용이 자기중심성으로 기울어버린 이 시대에, 실학은 실용 속에도 윤리와 책임이 자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추구하되, 그것이 나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되느냐에 있다. 우리에게는 실용을 다시 철학으로 세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저 '되는 것'을 좇기보다는 '옳은 것을 되게 만드는' 정치와 사회를 꿈꿔야 한다.
실학이 그런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진정 실용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만을 위한 판단과 행동을 멈추고, 공동체적 윤리와 실천의 가치를 회복하려 한다면, 실학은 더 이상 박물관 속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위한 철학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