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록보다 무서운 CEO의 '선택적 기억상실'

by 시온

뻔히 보이는 사실 앞에서도 당당하게 현실을 부정하는 리더를 만나는 것만큼 직장인에게 곤혹스러운 일은 없다. 기록된 활자보다 리더의 '기분'이 우선시되는 순간, 조직의 시스템은 마비되고 상식은 갈 길을 잃는다. 최근 지인에게 들은 한 기업의 에피소드는 이러한 '권위적 기억상실'이 어떻게 한 조직의 문화를 뿌리째 흔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느 날 임원회의에서 CEO가 지시를 내렸다. 유력 인사가 참여하는 행사에서 본인의 활동 모습을 라이브로 촬영하고, 이를 TV 광고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광고를 담당하는 고위 임원은 속으로 타당하지 않은 지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전에 "아니되옵니다"라고 했다가 호되게 질책을 받고 고집쟁이라고 불린 경험이 있었기에, 반대 의견을 낼까 망설였지만 결국 마지못해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광고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콘티 보고, 리허설, 촬영까지 모두 순조롭게 끝났고 편집 작업이 한창이었던 어느 날 오후, 비서실장으로부터 광고 담당 임원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왜 CEO가 출연하는 TV 광고를 찍게 되었냐"는 것이었다. 당황한 광고 담당 임원은 임원회의에서 공식적인 CEO 지시가 있어서 진행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 당신도 있지 않았냐고 답했다. 비서실장은 CEO께서 외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와서는 본인의 동의 없이 왜 TV 광고를 진행했냐며 노발대발하고 있으니 빨리 비서실로 오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광고 담당 임원은 실무 담당 부하 임원에게 비서실장과의 통화 내용을 전달하였다. 그러자 부하 임원은 펄펄 뛰며 "CEO가 거짓말하고 계신 겁니다. 행사 직전 광고 촬영을 위한 메이크업할 때도, 내가 15초 중 몇 초 나가냐고 물어보셨습니다"라며 항변했다.


광고 담당 임원이 비서실에 올라가니, 비서실 직원들도 이미 심하게 꾸중을 들은 상태였다. 한 직원이 임원회의록을 들고 와서는 "여기에 분명히 지시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상황을 파악한 광고 담당 임원과 비서실장은 잠시 상의 끝에 결론을 내렸다. 임원회의록을 보여주며 CEO의 실수를 지적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니, 비서실과 광고 부서 간 커뮤니케이션이 잘못돼서 발생한 일이라고 용서를 빌기로 한 것이다. 두 사람은 CEO 방에 들어가 싹싹 빌고 나왔다.


지인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이렇게 해석했다. 점심 때 CEO가 만난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TV 광고 출연을 얘기했을 것이다. 그런데 듣던 사람 중 누군가가 "당신이 그 행사에서 활동한 것을 찍어서 TV 광고를 만들면, 그 행사에 참석했던 힘 센 분이 싫어하실 것"이라고 조언했을 게 분명하다. 이 말에 CEO는 자신의 분별없는 판단이 창피해졌고, 그 창피함과 분노를 아랫사람들에게 분풀이한 것이라고.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CEO는 자기 자신을 완전무결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자신은 실수도, 잘못된 판단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모두 본인이 아닌 남의 탓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런 리더십이 보여주는 문제는 명확하다. 첫째, 책임을 전가한다. 본인의 명확한 지시로 시작된 일임에도 문제가 생기자 즉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린다. 둘째, 선택적 기억을 한다. 메이크업까지 받고 광고 출연 시간을 물어봤음에도, 나중에는 왜 진행했냐고 화를 낸다. 셋째, 권위를 이용해 현실을 왜곡한다. 명백한 증거인 회의록이 있음에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포장해서 사과하게 만든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CEO 밑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이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 '정직하게 의견을 내면 깨진다', '명확한 증거가 있어도 CEO의 실수를 지적하면 안 된다', 'CEO의 심기 경호를 위해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조직 문화를 병들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그 회사의 의사결정 시스템 자체를 망가뜨린다. 아무도 CEO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게 되고, 모두가 눈치만 보게 된다. 결국 황제의 새 옷을 입은 벌거벗은 임금처럼, 그 CEO는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강한 리더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완전무결함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런 리더 밑에서만 직원들도 정직하게 말할 수 있고, 조직도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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