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5년째, 고기를 먹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비건은 아니지만 개고기는 물론이고,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등 육고기를 먹지 않는다. 살아 있는 물고기를 바로 죽여야 먹을 수 있는 생선회도 되도록 피하는 편이다.
윤리적 채식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붙이기보다 그저 길고양이를 돌보면서 어찌어찌 파도를 타듯 연결되어 보게 된 <잡식 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를 보고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돼지고기는 그렇게 많은데 왜 우리는 살아 있는 돼지를 본 적이 없을까?
구제역으로 대량 살처분이 이어지던 즈음 감독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마트나 음식점, 심지어 집에서 김치찌개를 끓일 때에도 반드시 들어가는 돼지고기는 어느새 우리 생활에서 없으면 안 되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돼지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걸까?
그리고 살아 있는 돼지를 만나기 위해 시작한 여정에서 감독은 처참하고 잔인한 현실을 마주한다. 돼지들의 99프로 이상이 자기 몸 하나도 제대로 돌리기 힘들 만큼 좁은 스툴에 갇힌 채로 공장식 돈사에서 사육되는 현실을.
바람 한 점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기업형 돈사에 수백 수천 마리가 갇혀 생활하면서 돼지들은 이 세상에서 생명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도 맛보지 못한 채로 짧은 생을 살다 고기가 되기 위해 죽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스트레스와 질병은 항생제로 어찌어찌 무마한다지만 구제역이라도 한번 돌면 수십, 수백만 마리가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처분되는 것이 우리 축산의 현실이었다.
감독이 아들과 함께 돼지를 만나러 찾아간 소규모 생태농장은 이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십순이와 돈수 등 각각의 이름이 있는 돼지들은 자기들끼리는 물론 사람과도 교감하고 느낄 줄 아는 존재였다.
돼지도 저렇게 귀엽네, 맞다, 살아 있으니 저렇게 즐거워하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지, 생각하며 흐뭇하게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돈수가 차에 실려 가는 장면이 이어졌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돈수의 처연한 눈빛이 클로즈업되었을 때 그 눈에서 내가 돌보던 고양이나 강아지를 본 듯 가슴이 철렁했다.
처음부터 고기로 태어나는 존재는 없으며, 이 살코기도 언젠가는 생명이 있어 기뻐하고 슬퍼하고 느낄 줄 아는 어느 생명체의 흔적이었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너무 강렬해서 실제로 나는 그 후 사육되는 고기를 입에 댈 수 없었다. 황윤 감독의 의도도 그것이었다고 하니 관객으로서의 나는 제대로 저격당한 셈이다.
나는 고기는 안 먹지만 생선은 먹고 달걀이나 우유 유제품 등도 먹는다. 전문적인 분류에 따르면 세미 베지테리언, 페스코 채식주의자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만 해도 대단하다며 "어떻게 치킨을 안 먹을 수가 있어요?" 하고 신기한 듯 묻는다.
하지만 무엇을 먹고 무엇을 금하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만큼 먹고 우리 입에 오기까지의 모든 생명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안 먹어도 육식동물인 고양이들을 위해 닭가슴살을 준비하는 것 또한 나의 현실이며, 온통 미디어를 지배하는 먹방이나 음식프로 등 우리는 지나치게 먹는다는 생각이 가끔 드는 때문이다.
(사진은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의 한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