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하고 비릿한 소금기. 그리고 고막을 짓누르는 묵직한 이명.
강태현이 가장 먼저 인지한 것은 냄새와 소리였다.
눈을 뜨자 잿빛 천장이 보였다. 서늘한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가락 끝을 말아 쥐며 감각을 확인했다. 엄지와 검지가 마찰하는 익숙한 감각. 사설 하우스에서 수만 번이나 플라스틱 칩과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단련된, 극도로 예민한 촉각은 여전했다.
'여긴 어디지.'
태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쿵, 쿵, 쿵. 일정한 주기로 바닥 전체를 미세하게 울리는 거대한 기계음.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두꺼운 강철 격벽.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마카오의 어느 뒷골목에서 빚쟁이들의 사주를 받은 괴한들에게 뒷덜미를 가격당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창고나 지하실이 아니었다. 구조상 심해를 잠항하는 거대한 구조물, 혹은 해저 시추선 내부가 분명했다.
"으윽…."
"씨발, 내 머리… 여기 어디야!"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주변이 들어왔다. 원형으로 된 거대한 광장.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태현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하나둘씩 깨어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 문신으로 도배된 건달, 교복을 입은 학생까지. 공통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작위의 인간 군상이었다.
그때였다.
[친애하는 미도달자 여러분. 선각자 이사회의 요람, '판옵티콘'에 도달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계음이 아니었다. 소름 끼치도록 다정하고, 종교 음악처럼 성스러운 톤의 여성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광장 중앙의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이 켜지며 눈부신 백색광이 쏟아졌다.
"뭐, 뭐야? 장난해? 당장 내보내 줘! 내가 누군지 알아?!"
앞줄에 있던 금목걸이의 건달이 스크린을 향해 고함을 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 순간.
[경고. 오염된 언어는 영혼의 부식을 초래합니다. 해당 미도달자의 '정화 수치'를 삭감합니다.]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옴과 동시에, 건달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검은색 팔찌에서 시퍼런 스파크가 튀었다.
"끄아아아아악!"
건달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며 거품을 물었다. 단 한 번의 강력한 전기 충격. 압도적인 폭력이 일순간에 광장을 집어삼켰다. 방금 전까지 아우성치던 백여 명의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태현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투박한 검은색 스마트 밴드. 액정에는 [정화 칩: 100] 이라는 숫자가 빛나고 있었다.
'오염된 언어, 정화 수치, 미도달자….'
태현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납치범 치고는 어휘 선택이 기괴했다. 총이나 칼로 위협하는 대신, '언어'를 통제하여 순종을 강요하고 있다. 폭력은 거들 뿐, 진짜 무기는 저 기분 나쁜 종교적 단어들 속에 숨겨진 억압이다.
[여러분은 모두 지상의 오염된 삶에서 파산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이사회는 여러분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화면에 기괴한 십자가 문양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곳 판옵티콘에서는 오직 이사회가 부여한 '정화 칩'만이 유일한 생명줄입니다. 칩을 모두 잃은 자는 요람에서 방출됩니다. 자, 그럼 여러분의 영혼이 얼마나 절실한지 증명할 첫 번째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위이이잉-
그 순간, 광장 천장에 달려 있던 거대한 환풍구들이 일제히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태현은 즉각적인 신체의 변화를 느꼈다.
기압이 낮아지고 있었다. 아니, 산소가 희박해지고 있었다.
[첫 번째 의식, '숨결의 경매'입니다. 지금부터 3분간 요람의 산소가 차단됩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단말기를 통해 자신이 가진 100개의 칩 중 원하는 만큼을 베팅하여 '숨결'을 낙찰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광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상위 50%의 베팅자에게는 맑은 산소가 공급됩니다. 하위 50%는… 남은 시간 동안 스스로 숨을 참으셔야 할 겁니다. 자, 경매를 시작합니다.]
화면에 3:00이라는 붉은 타이머가 켜졌다.
단말기 액정이 베팅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헉, 허억… 미, 미친…."
"살려줘! 내, 내가 얼마를 내면 되는데!"
패닉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단말기 화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10을 입력했다가, 옆 사람이 50을 입력하는 것을 보고 황급히 숫자를 올렸다. 호흡이 가빠질수록 사람들의 이성은 급격히 마비되었다. '정화 칩'이 앞으로 생존에 얼마나 필요한지 계산할 겨를도 없이, 당장 목을 조여오는 질식의 공포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던지고 있었다.
"90! 아니, 100! 100 다 걸어! 일단 살고 봐야 할 거 아냐!"
곳곳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군중의 맨 뒷열, 어둠 속에 기대서 있던 태현은 단 한 번도 단말기를 터치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심장 박동을 늦추고 있었다.
'병신들. 판돈이 얼만지도 모르고 올인을 박아?'
태현은 차가운 눈으로 천장의 환풍구를 노려보았다.
이것은 데스게임이 아니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포커판이다.
첫째, 백 명의 사람을 심해 한가운데로 납치해 올 정도의 막대한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단이다.
둘째, 그들은 굳이 '미도달자'니 '정화'니 하는 종교적 프레임(프로파간다)을 씌워가며 사람들을 길들이려 하고 있다.
'이 거대한 무대를 세팅하는 데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겠지. 그런데 고작 첫 게임에서, 그것도 단 3분 만에 절반을 죽인다고? 칩을 아끼려는 똑똑한 놈들부터?'
포커판의 절대 진리가 있다. 하우스(카지노)는 결코 첫판에 손님을 죽이지 않는다. 판돈을 최대한 부풀리기 전까지는, 손님이 게임을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건 블러핑(공갈)이다.'
공기가 희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고통도 진짜다. 하지만 '하위 50%를 죽인다'는 것은 완벽한 기만전술이다. 이사회는 지금 극한의 공포를 조장하여 사람들이 가진 '칩(자본)'을 가장 무의미하게 소모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통제권을 잃고 하우스의 노예가 되도록.
"콜록! 컥, 커헉!"
1분이 지나자 체력이 약한 노인과 여자들이 먼저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태현도 시야가 흐려지고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본능이 당장 단말기에 100을 치라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태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딜러가 패를 돌리기도 전에 판을 엎는다고? 개수작 부리지 마.'
태현은 단말기에 숫자를 입력했다.
[입력 완료: 0]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이미 바닥을 기어 다니며 목을 긁어대고 있었다. 모두가 집단착각에 빠져 있었다. '무조건 높은 숫자를 적어야 산다'는 맹신. 이사회가 만들어낸 공포의 언어에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다.
시야가 암전되기 시작했다. 태현은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몽롱해지는 정신줄을 다잡으며 정면의 CCTV 렌즈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입 모양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콜(Call). 패 까봐, 개새끼들아.'
[경매가 종료되었습니다.]
그 순간.
푸쉬쉬쉬쉬-!!
천장의 배기구에서 굉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백색 기체가 쏟아져 내렸다. 고농축 산소였다.
"허어어어억-!!"
"콜록, 컥, 하아… 하아아…."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던 사람들이 탐욕스럽게 산소를 들이마셨다. 지옥 같던 3분이 끝나고, 광장은 거친 숨소리와 오열로 가득 찼다. 태현 역시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폐부를 채웠다. 핑 돌던 머리가 맑아지며 감각이 돌아왔다.
살았다. 그의 계산이 맞았다.
그리고 곧이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스피커의 낭독이 이어졌다.
[결과를 발표합니다. 하위 50%에 해당하는 미도달자 여러분, 숨을 참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내심에 찬사를 보냅니다.]
"…뭐? 무슨 소리야?"
100칩을 모두 베팅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사내가 멍한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위 50%도 기절 직전까지 갔을 뿐, 지금은 멀쩡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 요람의 산소는 원래 모두에게 평등하게 제공됩니다. 자비로운 이사회는 여러분의 숨통을 조일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두려움'에 굴복하여 얼마나 쉽게 영혼(칩)을 내던지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황급히 자신의 손목 단말기로 향했다.
[정화 칩: 0]
[정화 칩: 10]
[정화 칩: 0]
공포에 질려 칩을 쏟아부었던 사람들의 손목에는 처참한 숫자만이 남아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은 순식간에 끔찍한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니 '두려움'을 참아낸 자들만이 칩을 고스란히 보존했다.
[아, 안타까운 소식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칩을 모두 소진한 자는 요람에서 방출됩니다. 첫 번째 의식에서 100칩을 모두 베팅하여 파산한 43명은… '폐기' 처분하겠습니다.]
"뭐? 자, 잠깐만! 속인 거잖아! 너희들이 산소를 뺀다고…!"
철컥-!
항의하던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의 트랩도어 43개가 동시에 열렸다.
"으아아아아악-!!"
100칩을 베팅했던 43명의 인간들이 비명과 함께 시꺼먼 바닥 아래, 칠흑 같은 심연의 구덩이 속으로 흔적도 없이 추락했다.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너무도 깔끔하고 압도적인 학살이었다.
남은 50여 명의 생존자들은 얼어붙은 채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주최 측은 단 3분 만에, 참가자들 스스로가 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줄(칩)을 버리게 만들었고, 그 대가로 절반을 숙청했다. 완벽한 심리 조종이자 악마적인 집단착각의 결과물이었다.
광장이 공포의 도가니가 된 와중.
어둠 속에서 강태현만이 홀로 손목의 단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화 칩: 100]
베팅 액수 0.
그는 1원도 잃지 않은, 이 지옥석의 유일한 '풀 칩(Full Chip)' 보유자였다.
태현은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두려움에 떠는 군중들과 달리,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서늘한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이 판, 내가 다 발라먹는다.'
심해의 포커판. 그 거대한 사기극의 막이 방금 막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