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하우스의 레이크(Rake)

by 연구소장

43명의 절규가 아직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하지만 눈앞에 남은 것은 매끄럽게 닫힌 강철 바닥뿐이었다.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소름 끼치도록 깔끔하고 압도적인 처형. 거대한 원형 광장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남은 57명의 생존자들은 방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이들이 흔적도 없이 심연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뇌가 거부하는 듯,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다시 그 기분 나쁠 정도로 평온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비로운 이사회의 품에서 첫 번째 의식을 무사히 치러낸 것을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헛된 두려움을 극복하고 생존이라는 축복을 얻어냈습니다.]


축복이라는 단어에 누군가 마른 구역질을 했다.


어둠 속에 기대서 있던 강태현은 묵묵히 손목의 스마트 밴드를 내려다보았다.


[정화 칩: 100]


살아남은 57명 중, 처음 지급된 풀 칩(Full Chip)을 단 1칩도 잃지 않고 온전히 보존한 이는 태현이 유일했다. 대다수는 질식의 공포에 이성을 잃고 산소 경매에서 70에서 90에 달하는 칩을 허무하게 탕진해버린 상태였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굳게 닫혀 있던 광장 정면의 거대한 격벽이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좌우로 열렸다.


"이동해라. 그곳이 너희들이 머물 '요람'이다."


어디선가 방독면을 쓰고 검은 방검복을 입은 사내들이 곤봉을 들고 나타나 생존자들을 거칠게 몰아넣기 시작했다. 총기류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세에 사람들은 짐승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열린 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격벽 너머의 공간인 '요람'은 거대한 벌집 같았다.


차가운 강철 벽면을 따라 사람이 딱 한 명 누울 수 있는 캡슐형 수면실이 수십 개씩 층층이 박혀 있었고, 중앙 광장에는 식수대와 배식기처럼 보이는 투박한 자판기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전형적인 첨단 수용소의 형태였다.


[요람에서의 생활 수칙을 안내해 드립니다.]


사람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볼 때쯤, 다시 안내 방송이 울렸다.


[이곳 판옵티콘에서의 모든 은혜는 여러분의 '정화 칩'으로 교환됩니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과 안식은 모두 공정하게 제공되나, 공짜는 아닙니다.]


그 순간, 중앙 광장 위로 커다란 홀로그램 스크린이 떠오르며 단가표가 나타났다.



정화의 샘물 (생수 500ml) : 1칩


육신의 양식 (영양 보충 팩 1개) : 2칩


비워냄의 방 (화장실 1회, 10분 제한) : 1칩


안식의 요람 (캡슐 수면실 1일 사용권) : 5칩



목록을 확인한 태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아직 저 숫자들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사설 하우스에서 수만 번이나 칩을 굴려본 태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잔혹한 계산이 끝난 상태였다.


'하루 최소 생존 비용, 넉넉잡아 10칩. 아니, 짐승처럼 숨만 쉬고 버텨도 최소 6에서 7칩은 나간다.'


물 한 병, 식사 한 번, 화장실 두 번, 수면실 한 번. 목숨만 연명하는 데 하루 7칩이 필요하다. 하지만 첫 번째 산소 경매에서 호구처럼 칩을 부어버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 10에서 30칩 남짓만을 가지고 있었다. 빠르면 내일, 길어야 3, 4일 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칩이 0이 되어 바닥 밑으로 추락한다는 뜻이었다.


태현은 홀로그램 스크린에 뜬 기괴한 단어들을 곱씹었다.


저들은 평범한 생수와 밥을 굳이 정화의 샘물, 육신의 양식 같은 성스러운 단어로 포장하고 있다. 폭력보다 훨씬 더 지독한 심리적 통제 장치다. 사이비 종교에서나 쓸 법한 폐쇄적인 언어로 생존자들의 뇌를 씻어내어, 부당한 착취를 마치 당연한 율법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수작.


게다가 이 시스템의 진짜 목적은 사람들의 반항 의지를 거세하는 데 있었다. 당장 오늘 마실 물 한 모금, 내일 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의 결핍 상태에 놓이면, 인간은 시야가 좁아져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싸울 생각 따윈 하지 못한다.


이건 카지노에서 딜러가 매 판마다 떼어가는 수수료, 이른바 '레이크(Rake)'와 완벽히 똑같은 구조였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하우스는 참가자들의 피를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려 죽인다. 그리고 결국 남은 칩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잃어버린 칩을 만회하기 위해 사람들은 하우스가 깔아놓은 다음 도박판에 스스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이게 말이 돼?! 화장실 가는 데도 칩을 내라고?!"


태현의 계산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말기에 8칩이 남은 중년 남자가 자판기 앞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미친 듯이 자판기를 걷어찼지만, 견고한 강철 기계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장난해! 밖으로 내보내 줘! 당장 내보내라고!"


그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순간, 천장에 달린 감시 카메라의 붉은 렌즈가 징- 소리를 내며 그를 향해 돌아갔다.


[경고. 요람의 기물을 파손하고 오염된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는 이사회의 은혜를 저버리는 불경입니다. 정화 수치 5칩을 삭감합니다.]


"뭐, 뭣?!"


남자의 단말기에서 삐빅- 소리가 나더니, 8이었던 숫자가 순식간에 3으로 떨어졌다. 남자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3칩. 물 한 병과 영양 팩 하나면 끝날 목숨값이었다.


"아, 안 돼… 내 칩… 돌려줘… 안 돼…."


남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말로를 지켜보던 다른 생존자들의 눈동자에도 짙은 공포가 전염되었다. 누구도 섣불리 불만을 터뜨리거나 욕설을 내뱉지 못했다. 이사회의 룰은 보이지 않는 목줄이 되어 사람들의 숨통을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태현은 군중의 절망을 뒤로하고 조용히 자판기 앞으로 다가갔다. 목이 타들어 갈 듯이 말라 있었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단말기를 자판기 스캐너에 가져다 댔다.


띡-


[정화 칩: 99]


맑은 생수 한 병이 덜컹거리며 굴러나왔다. 태현은 뚜껑을 열고 물을 길게 들이마셨다. 비릿한 피 맛이 가시며 메말랐던 식도가 시원하게 젖어 들었다.


자판기에 찍힌 그의 남은 칩 수를 본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99. 이곳에서는 압도적인 부의 상징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에게는 보름을 버틸 수 있는 생명줄이 태현의 낡은 트렌치코트 소매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시선들이 노골적으로 태현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동경, 시기, 질투, 그리고 짐승 같은 탐욕.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얇은 유리창 같은지 태현은 사설 하우스의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만간 저들 중 누군가는 굶주림에 미쳐 그를 덮칠지도 모른다.


태현은 빈 물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퀭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수십 명의 군중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뭘 봐. 내 칩 뜯어갈 배짱 있는 새끼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당장 덤비든가."


조롱 섞인 태현의 목소리가 요람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흠칫 놀란 사람들이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천장에서는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폭력을 쓰면 칩이 깎인다. 지금 당장 태현을 공격해서 칩을 빼앗을 방법도, 그럴 용기를 가진 자도 아직은 없었다.


태현은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군중에게 자신이 만만한 먹잇감이 아님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포커판에서 약해 보이면 끝장이다. 칩을 많이 가진 자가 방어적으로 나오는 순간 하이에나 떼가 몰려든다. 지금은 철저하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자의 스탠스로 상대를 기만해야 했다.


태현이 가장 구석에 있는 캡슐 수면실의 패드를 터치하고 문을 열려는 찰나, 다시 한번 스피커가 벙커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미도달자 여러분. 칩이 부족하여 다가올 안식이 두려우십니까?]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천장으로 향했다. 죽어가던 눈동자들에 희미한 동아줄 같은 희망의 빛이 도는 것을 태현은 곁눈질로 놓치지 않았다.


[자비로운 이사회는 여러분의 헌신을 시험하고, 그에 합당한 축복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일 아침 08시. 여러분의 영혼을 증명할 '두 번째 의식'이 거행됩니다.]


방송이 이어지자 요람 안이 일순간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의식에서 헌신을 증명하는 승리자에게는 막대한 양의 정화 칩이 내려질 것입니다. 오늘 밤은 부디 이사회의 가호 아래 평안히 쉬시길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뚝 끊겼다.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내일 게임에서 승리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맹목적인 생존욕구가 요람 안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태현은 그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병 주고 약 주기. 목을 조르다가 숨구멍을 틔워주며 자신들이 마치 구원자인 양 착각하게 만드는 얄팍한 통제술이다. 저들은 내일 아침,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의 목을 밟고 올라설 준비를 마친 하우스의 충실한 장기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캡슐 안으로 몸을 뉘인 태현은 5칩이 차감되는 소리를 들으며 닫힌 강철 천장을 응시했다.


막대한 칩을 준다라. 카지노에 꽁돈은 없다. 누군가 판돈을 쓸어간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그만큼의 칩을 잃고 바닥으로 내던져진다는 뜻이다.


태현은 주머니 속에서 낡은 카지노 칩 하나를 꺼내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말려 올라갔다.


하우스에서 정식으로 패를 돌리시겠다. 그렇다면 상대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얌전히 놀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태현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심해의 카지노, 판옵티콘에서의 지독한 첫날 밤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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