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오다 노부나가는 죽을 운명이었다

혼노지의 변, 필연의 해부학

by 연구소장

프롤로그 : 440년째 풀리지 않는 질문



1582년 6월 2일 이른 새벽, 교토의 혼노지(本能寺)가 1만 3천 명의 군대에 포위되었습니다.


고요하게 잠들어 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처음에는 하인들이 싸우는 소리려니 했습니다. 측근을 내보내 확인하게 했고, 곧 보고가 돌아왔습니다. "혼노지가 대군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깃발의 문장은 도라지였습니다." 도라지. 아케치 가문의 문장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짧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어쩔 도리가 없다(是非に及ばず)."


그로부터 4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아직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는 왜 주군을 죽였는가.


오랜 원한 때문이었다는 설, 조정(천황)의 밀명을 받았다는 설, 자신의 영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했다는 설, 단순한 권력욕이었다는 설. 가설은 제각각이었고,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사건 직후 미쓰히데 본인이 13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가 남긴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혼노지의 변은 일본사에서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그 미스터리에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다만 단정이 아니라 추정입니다. 심리학, 경영학, 조직행동론, 전술학, 정치학. 이 다섯 가지 학문의 시선으로 노부나가의 49년 생애와 미쓰히데의 심리 변화를 교차 분석하면서, 가장 합리적인 근거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 과정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두 개의 카메라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노부나가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그의 곁에서 조용히 변해가던 미쓰히데를 향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렀고, 1582년 6월 2일 새벽에 하나로 충돌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사망 확률 기준점은 5%로 설정하겠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의 기본값입니다. 이제 노부나가가 직접 이 수치를 올려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사망 확률 5% [■□□□□□□□□□□□□□□□□□□□] ↑ 기준점 — 살아있음의 기본값 (+5%)



1장 : 오케하자마, 아직은 신중한 사나이



불확실성을 알던 청년

1560년, 오와리(尾張)의 군소 다이묘였던 노부나가에게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2만 5천 대군이 쳐들어오는데, 그의 병력은 고작 2천이었습니다. 부하들은 농성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춤을 추며 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그 계산입니다. 농성하면 확실히 죽습니다. 기습하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습니다. 확률상 기습 쪽이 낫습니다. 노부나가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불리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가장 나은 수를 골라냈습니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이 날아갔습니다. 운도 따랐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가 시야를 가려 기습이 성공한 것입니다. 이때의 노부나가는 자신의 성공에 우연이 작용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랬습니다.


심리학적 귀인 이론

"인간은 자신이 거둔 성공에서 우연이나 운이 작용한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실패는 운이 나빴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성공이 반복될수록 이 착각은 깊어진다."


오케하자마의 노부나가는 아직 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신중했고, 탈출로를 계산했으며, 운에 감사할 줄 알았습니다.


한편 이 시절 아케치 미쓰히데는 아직 노부나가의 부하가 아니었습니다. 낭인으로 떠돌던 이 지식인 무장은 먼 곳에서 오와리의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혼란한 시대를 정리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났다는 소문. 총명하고, 과감하고, 실력만으로 사람을 쓴다는 평판. 그런 주군을 모시고 싶다는 기대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의 미쓰히데에게 노부나가는 아직 희망이었습니다.


☠ 사망 확률 5% [■□□□□□□□□□□□□□□□□□□□] ↑ 오케하자마 — 위기관리 본능 건재, 변화 없음 (+0%)



2장 : 가네가사키, 도망치는 것도 전략이다



그는 아직 배울 줄 알았습니다

1570년, 이번에는 앞뒤로 포위당했습니다. 아사쿠라 가문을 치러 에치젠으로 들어갔는데, 동맹이었던 아자이 나가마사(浅井長政)가 뒤통수를 쳤습니다. 앞에는 아사쿠라, 뒤에는 아자이. 협공이었습니다.


이 순간 노부나가가 선택한 것은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군기를 버리고, 체면을 버리고, 그냥 뛰었습니다. 무장의 수치라지만, 그 자리에서 싸우다 죽으면 오다 가문이 끝장났을 것입니다. 노부나가는 그 계산을 순식간에 해냈습니다.


위기관리론

"위기관리의 진정한 과제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해도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도, 체면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가네가사키 퇴각전은 노부나가의 전술적 정직함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아직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고, "살아남아야 이긴다"는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이 무렵 아케치 미쓰히데는 이미 노부나가의 부하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탁월한 외교 감각과 학식으로 조정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전장에서도 성과를 냈습니다. 이 시절 미쓰히데에게 노부나가는 존경할 만한 주군이었습니다. 가혹하지만 공정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탁월한. 그 균형이 아직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전연승의 기록이 쌓일수록, 노부나가의 머릿속에서 "운"의 자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나의 실력"의 자리가 커졌습니다.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 사망 확률 10% [■■□□□□□□□□□□□□□□□□□□] ↑ 가네가사키 — 성공 축적 시작, 과잉 확신의 씨앗 (+5%)



3장 : 히에이잔, 3천 명을 태우다



구체제 파괴, 그 속도의 문제

1571년 9월, 노부나가는 일본 불교의 성지 히에이잔(比叡山)을 불태웠습니다. 승려, 아녀자, 어린이 할 것 없이 3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당시 기록에는 이렇게 남아 있습니다. "산 전체가 불타올랐다."


전략적 판단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에이잔의 불교 세력은 노부나가의 적인 아자이·아사쿠라 연합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중립을 선언한 종교 기관이 뒤통수를 친 것입니다. 응징의 논리는 성립했습니다. 문제는 그 방식과 규모였습니다.


정치학 — 마키아벨리의 경고

"군주가 불가피하게 잔인한 수단을 써야 할 경우, 그것은 단번에 전격적으로 실행되고 이후에는 백성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가해 행위가 매일 거듭되거나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는 군주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이 사건이 낳은 부작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반발이었습니다. 수백 년간 종교적 권위로 존재하던 불교 세력과 전통 기득권층이 노부나가를 "괴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부의 충격이었습니다.


조직행동론 —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어떤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믿음이나 가치와 충돌을 일으킬 때 극심한 불편함을 느끼는 현상을 인지부조화라고 부른다. 이 부조화가 장기화되면 직무 탈진과 극단적 반응의 강력한 예측 변수가 된다."


미쓰히데는 이 학살 명령을 직접 수행했습니다. 불꽃이 산을 타오르는 것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기록은 침묵합니다. 하지만 옛 귀족 문화와 불교 교양을 몸에 익힌 지식인에게, 성지를 불태우고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하는 광경은 단순한 전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평생 믿어온 가치와 자신의 두 손이 하는 일 사이에서 균열이 생겼습니다. 이 균열은 그 후로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 사망 확률 27% [■■■■■□□□□□□□□□□□□□□□] ↑ 히에이잔 화공 — 종교 세력 반발 + 미쓰히데 내면의 균열 시작 (+17%)



4장 : 막부를 해체하다 — 혁명가의 속도 위반



"천하포무(天下布武)" —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한다

1573년, 노부나가는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교토에서 추방하며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사실상 해체했습니다. 약 240년간 일본을 지배한 봉건 권위의 상징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특권 상인 조합(座)을 해체하고 자유시장 경제(楽市楽座)를 도입했습니다. 신분과 출신에 관계없이 실력만으로 인재를 발탁했습니다. 조총을 조직적으로 도입해 전투 방식 자체를 바꿔버렸습니다. 혁명적이었습니다. 실제로 혁명이었습니다.


사회유기체론 —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

"사회라는 유기체는 모든 생명체만큼이나 복잡해서 우리 힘으로는 급작스레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급격한 개혁이 바람직해 보일지라도, 그런 개혁에 대한 강박적 열망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


문제는 속도였습니다. 수백 년간 뿌리내린 질서를 불과 몇 년 사이에 뒤집어 버리면서, 노부나가는 사회가 새로운 체제를 소화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빼앗긴 자들은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섰고, 새로운 질서로 이익을 얻은 자들은 아직 체제가 확고하지 않아 미온적으로 대처했습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자는 가장 위험한 자리에 섰습니다. 노부나가가 더 많은 적을 만들수록, 그를 진심으로 지켜줄 우군은 줄어들었습니다.


미쓰히데는 이 모든 개혁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조했습니다. 외교를 담당하던 그에게는 가장 바쁜 동시에 가장 복잡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래된 질서를 부수는 것이 반드시 옳은가. 답은 없었습니다. 다만 주군의 명령은 분명했고, 미쓰히데는 그것을 따랐습니다. 그 속도가 맞는 것인가.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빠르게 부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의문은 입 밖에 낼 수 없었습니다.


☠ 사망 확률 38% [■■■■■■■■□□□□□□□□□□□□] ↑ 막부 해체·급진 개혁 — 적은 늘고 우군은 얕아진다 (+11%)



5장 : 사쿠마 노부모리를 쫓아내다 — HR 역사상 최악의 인사



30년 공신에게 보내는 19개 조의 힐책 서장

1580년, 노부나가는 충격적인 문서를 발송했습니다. 수신인은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오다 가문에 30년을 바친 최고참 숙장(宿將)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최근 5년간 이렇다 할 전공이 없다. 나이를 핑계로 전의가 없다. 여러 기회가 있었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 힐책 서장은 총 19개 조에 달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 서한 한 통으로 사쿠마 노부모리를 고야 산(高野山)으로 추방했습니다.


경영학 — 생존자 증후군(Survivor Syndrome)

"대규모 숙청이나 구조조정 이후 살아남은 직원들은 공정성에 대한 불신과 조직 몰입도의 급격한 저하를 겪는다.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스스로 이직을 선택하거나 조직에 반감을 품게 된다. "다음 차례는 나일 수도 있다"는 고용 불안감이 조직 전체를 잠식한다."


현대 경영학 용어로 표현하면, 이것은 직원들을 강제로 서열화해 하위 등급을 잘라내는 극단적 "스택 랭킹(Stack Ranking)"의 실행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이 제도를 운용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직원들이 외부 경쟁사와 싸우지 않고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며 내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사쿠마 노부모리의 추방은 미쓰히데에게 훨씬 무거운 사건이었습니다. 30년. 오다 가문을 위해 30년을 바친 사람이 서한 한 통에 쫓겨났습니다. 미쓰히데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스스로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몇 년째인가. 나는 충분한 성과를 내고 있는가. 내가 불필요해지는 순간은 언제인가. 존경은 서서히 공포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충성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그것이 자발적인 충성인지 살아남기 위한 충성인지, 미쓰히데 자신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사망 확률 57% [■■■■■■■■■■■□□□□□□□□□] ↑ 사쿠마 노부모리 추방 — 조직 전체 공포, 미쓰히데의 뇌관에 불씨 점화 (+19%)



6장 : 한 지식인 무장의 소진 — 아케치 미쓰히데라는 시한폭탄



10년이 하나의 방아쇠로 수렴하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2인자였습니다. 무장이기 이전에 교양과 옛 전통을 중시하는 지식인이었고, 조정과의 외교를 담당하던 문화인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가혹했습니다. 연회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힘들게 준비한 외교 접대 자리를 갑자기 뒤엎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무엇보다, 히에이잔 학살 같은 잔혹한 명령을 이 지식인에게 반복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조직행동론 — 감정 노동(Emotional Labor)과 번아웃 신드롬

"조직이 강요하는 행동과 자신의 내면 가치가 충돌할 때, 개인은 감정을 강제로 연기하는 "감정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이 상태가 장기화되면 직무 탈진, 즉 번아웃이 발생한다. 역설적이게도, 번아웃은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사람일수록 걸리기 쉽다.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이 그 이상을 반복적으로 짓밟히는 상황에 놓일 때 심리적 방어기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조직행동론의 "정서적 사건 반응 이론(AET)"에 따르면, 직장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사건들은 직원에게 감정적 반응을 유발하고, 이 반응은 차곡차곡 쌓입니다. 히에이잔 화공의 충격 위에 사쿠마 추방의 공포가 쌓이고, 공개 모욕의 수치심이 더해지고, 예측 불가능한 주군의 폭거가 반복되었습니다. 각각의 사건은 작은 도화선이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넘게 누적된 그것들은 하나의 뇌관이 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미쓰히데의 반란을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전통과 교양을 중시하는 지식인이 급진적인 파괴주의자 밑에서 서서히 소진되어 간 결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현대 조직행동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 해석은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1582년 봄,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모리 가문이 있는 서쪽으로 출진해 히데요시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출진 직전,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의 영지 일부를 갑자기 몰수했습니다. 새로운 임무를 위한 재편성이라는 명목이었지만, 미쓰히데의 눈에는 달리 보였습니다. 성과를 내도 빼앗긴다. 사쿠마처럼. 충성과 공포 사이에서 흔들리던 저울이 마침내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 사망 확률 74% [■■■■■■■■■■■■■■■□□□□□] ↑ 미쓰히데 반복 가혹 대우 — 지식인 2인자의 심리적 임계점 초과 (+17%)



7장 : 혼노지, 호위병 100명 — 최고 전략가의 자충수



확증 편향이 만들어낸 완벽한 빈 공간

1582년 6월,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지에 머물렀습니다.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과 싸우는 전선을 지원하러 가기 전 잠시 쉬어가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그의 호위 병력은 100여 명이었습니다.


전장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사방에 적이 있는 상황에서, 2인자의 반감을 보여주는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상황에서, 천하인(天下人)은 호위병 100명을 데리고 무방비 상태로 잠들었습니다.


"당시 오다 가문의 주력 부대는 모두 각지의 전선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빗추에서, 시바타 가쓰이에는 호쿠리쿠에서,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간토에서 각각 싸우고 있었다. 혼노지는 천하인이 머무는 전략적 심장부였지만, 호위 병력이 거의 없는 완벽한 빈 공간이었다." — 역사 기록



이 모순을 이해하려면 심리학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 필요합니다. 확증 편향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취하고 불리한 것은 아예 들을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인지의 함정입니다. 노부나가의 머릿속에는 "아케치 미쓰히데는 나의 충실한 부하이며, 내 통제하에 완벽히 움직이고 있다"는 강력한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미쓰히데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신호, 반감을 품고 있다는 징후들은 모두 이 전제에 의해 걸러졌습니다. 부하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비관 시나리오" 자체가 노부나가의 인식 체계에서 이미 삭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전술학 — 피실격허(避實而擊虛)

"강점을 피하고 약점을 찌른다는 손자병법의 핵심 원리. 아케치 미쓰히데는 이 원리를 정확히 실행했다. 오다 가문의 주력은 모두 지방 전선에 분산되어 있었고, 혼노지는 가장 중요한 심장부임에도 호위가 없는 완벽한 빈 공간이었다. 미쓰히데는 1만 3천 명의 병력을 이 한 점에 집중했다. 전술적으로 교과서에 나올 법한 기습이었다."


1582년 6월 1일 밤, 미쓰히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는 길목에 섰습니다. 그 길의 끝은 모리 가문의 전선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멈췄습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100명의 호위병만 데리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히에이잔의 불길, 사쿠마의 추방, 빼앗긴 영지, 공개적인 모욕. 10년이 넘게 쌓인 것들이 그 순간 하나의 생각으로 수렴했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없다. 미쓰히데는 군대를 돌렸습니다.


과거의 노부나가였다면 이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네가사키에서 체면보다 생존을 택했던 그 사람이라면, 2인자의 심리 변화쯤은 진작 읽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1582년의 노부나가는 이미 달랐습니다. 연전연승이 낳은 과잉 확신, 비판자를 모두 쫓아낸 조직 편향, "내 부하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증 편향이 겹쳐지면서, 가장 기본적인 위기관리조차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 사망 확률 95% [■■■■■■■■■■■■■■■■■■■□] ↑ 혼노지 무방비 숙박 — 확증 편향 + 위기관리 완전 붕괴 (+21%)



8장 : 혼노지의 변 — 사망 확률 100%



1582년 6월 2일, 새벽 4시

아케치 미쓰히데는 1만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새벽길을 걸었습니다.

교토로 향하는 길에서 그는 외쳤습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부하들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목적지가 모리 가문이 있는 서쪽이 아니라 교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었습니다. 미쓰히데의 군대는 혼노지를 포위했습니다.


군대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처음에는 하인들이 싸우는 소리로 여겼습니다. 측근을 내보내 확인하게 했고, 보고가 돌아왔습니다. "혼노지가 대군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깃발의 문장은 도라지였습니다." 도라지 문장은 아케치 가문의 것이었습니다. 노부나가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다(是非に及ばず)."


그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활을 집어들고 몰려드는 적들에게 맞섰습니다. 시위가 끊어지자 창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적의 숫자는 압도적이었습니다. 깊은 부상을 입자 노부나가는 싸움을 멈추고 침소인 고덴(御殿)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시종 모리 란마루에게 불을 지르게 한 뒤, 불타는 고덴 안에서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49세였습니다. 란마루 역시 그 자리에서 아케치 군의 장수에게 살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 사망 확률 100% [■■■■■■■■■■■■■■■■■■■■] ↑ 혼노지의 변 — 필연적 결말 (+5%)


아케치 미쓰히데의 결말도 비참했습니다. 거사 13일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야마자키 전투에서 대패한 그는 도주 중 이름 없는 농민의 죽창에 찔려 쓰러졌습니다. 55년의 생이었습니다. 천하인을 꿈꾸었으나 역사는 그에게 단 13일의 권력을 허락했습니다.



에필로그 : 440년 만의 추정



사망 확률의 변화를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기준점 5% → 오케하자마 5% → 가네가사키 10% → 히에이잔 화공 27% → 막부 해체 38% → 사쿠마 노부모리 추방 57% → 미쓰히데 가혹 대우 74% → 혼노지 무방비 95% → 혼노지의 변 100%.


이 흐름에서 한 가지 패턴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노부나가의 사망 확률은 외부의 적이 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노부나가 자신이 한 단계씩 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아케치 미쓰히데는 왜 주군을 죽였는가.

이 글의 추정은 이렇습니다.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히에이잔에서 시작된 가치관의 충돌, 사쿠마 추방을 보며 깊어진 공포, 반복된 공개 모욕으로 켜켜이 쌓인 수치심, 영지 몰수로 촉발된 생존 본능. 이 네 가지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층층이 쌓였고, 혼노지에 호위병 100명뿐이라는 사실이 그것들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복수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냉정했고,

야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오래 참았으며,

공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충성과 공포와 자존심과 생존 본능이 뒤섞인 10년의 압축. 그것이 이 칼럼의 결론입니다.


물론 이것은 추정입니다. 미쓰히데는 사건 13일 후에 이름 없는 농민의 죽창에 찔려 죽었고, 끝내 자신의 말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혼노지의 변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으로 남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히에이잔에 불을 지를 때마다, 충신을 쫓아낼 때마다, 부하의 감정을 짓밟을 때마다, 경계를 풀 때마다 — 혼노지의 불길은 조용히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닦은 것은 미쓰히데가 아니라 노부나가 자신이었습니다.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노부나가는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겼습니다. 개혁에 성공했습니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속적인 성공이 그를 죽였습니다. 성공은 그에게서 신중함을 빼앗았고, 공감 능력을 앗아갔으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마저 닫아버렸습니다.


"인간 오십 년, 하천에 비하면 몽환과 같구나(人間五十年 下天の内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 오다 노부나가가 즐겨 부르던 노래 — 아츠모리(敦盛)의 한 구절



그는 이 노래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진실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다른 문제입니다.


혼노지의 불길은 그 착각에 대한, 역사의 짧고 냉혹한 정정(訂正)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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