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시험에도 부정행위가 있었을까?

'공명정대'의 장막 뒤에 숨겨진 욕망과 꼼수

by 연구소장

1476년 봄, 과거 시험장


성종 7년(1476년) 봄. 창경궁 앞 너른 공터에 수천 명의 인파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습니다.


시험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과장(科場) 안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노복들이 자리다툼을 벌이고, 장막을 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양반 자제들은 하인에게 짐을 맡겨두고 넓은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펼쳤습니다. 작은 서책이었습니다.


그날 성종은 감찰관 엄용선을 불러 특명을 내렸습니다. '직접 가서 낱낱이 살펴보고 오라.' 엄용선이 응시자들의 품과 소매를 뒤지기 시작하자 서책이 하나둘 쏟아졌습니다. 한두 명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명이었습니다. 엄용선이 임금에게 올린 보고는 짧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전하, 거자(응시자) 가운데 책을 끼고 들어오지 아니한 자는 하나도 없사옵니다!"



전원 유죄. 조선 역사상 초유의 집단 컨닝 사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500년의 과거 시험장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훨씬 더 조직적이며, 마침내는 국가 자체가 공범이 되는 수준으로까지 치달았습니다. 공자의 말씀을 줄줄 외우던 지식인들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제1부. 실력주의의 붕괴 : 공명정대의 장막 뒤에 숨겨진 욕망


조선 왕조 500년의 근간을 지탱한 가장 강력한 시스템은 단연 과거(科擧) 제도였습니다. 혈통과 가문이 모든 것을 결정하던 이전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오직 학문적 실력만을 평가해 관리를 선발하겠다는 이 제도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혁신적인 실력주의의 표상이었습니다. 붓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희망. 겉으로 보기에 과거 시험장은 그 희망이 실현되는 '공명정대(公明正大)'의 성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명분의 장막을 걷어내면, 그 뒤에는 권력과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기괴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도덕과 예의를 부르짖으면서도 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합격이라는 전리품을 쟁취하려 했던, 양반 사대부들의 씁쓸한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역사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을까요?


1. 합격 하나로 집안이 살고 죽었다


조선의 양반들이 목숨을 걸고 과거에 매달렸던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과거 급제는 곧 '생존'이자 권력을 쥐는 유일한 사다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배가 외국에 통하질 않고, 수레가 나라 안에 다니질 못하는' 폐쇄적인 농업 중심 국가였습니다. 상업과 유통이 철저히 통제되고 천시받는 사회에서 사업이나 무역으로 부를 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오늘날처럼 창업을 하거나 투자로 재산을 불리는 길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합법적으로 잘살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하나뿐인 사회였습니다.


그 하나의 방법이 바로 관직, 즉 권력이었습니다. 토지와 노비, 조세 수취권 같은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려면 벼슬자리를 쥐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뼈대 깊은 양반 가문이라 해도 3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의 지위 자체를 잃고 몰락하는 가혹한 룰이 있었습니다. 개인의 영달, 가문의 명운, 막대한 경제적 보상이 한꺼번에 걸린 판이었으니, 공명정대라는 잣대가 쉽게 무뎌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2. 사서삼경을 외우며 이익을 탐한 지식인들의 이중생활


과거 시험의 가장 큰 모순은 시험 과목과 응시자들의 실제 행동 사이의 엄청난 괴리에 있었습니다. 응시생들은 평생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가르침을 담은 유교 경전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에는 이런 말이 버젓이 적혀 있었습니다.


"군자는 도를 도모하지 먹는 것을 도모하지 않는다. 학문을 하면 녹봉이 그 가운데 있다." (論語)



한마디로, 출세와 이익을 목적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放於利而行, 多怨)'는 경고까지 있었으니, 과거 응시생들은 이 구절을 외울 때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시험장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세종과 성종 시대의 유생들은 평소에는 학문을 닦지 않다가 시험 날이 되면 소매 속에 수험서나 요약집을 숨겨 들어왔고, 남의 글을 뻔뻔하게 표절했습니다. 입으로는 '군자의 도'를 외치고 붓으로는 성리학의 도덕정치를 써 내려가면서도, 소매 속에는 컨닝페이퍼를 챙겨 넣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400년 전 조선 과거장에서도, 그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3. 꼼수는 어떻게 국가 범죄가 됐나


욕망은 통제되지 않으면 진화하기 마련입니다. 과거 부정행위는 처음에는 수험생 개인의 얄팍한 꼼수에서 출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규모와 대담함이 커지며 국가 시스템 전체를 부패시키는 암세포로 자라났습니다.


세종 시대 수재 임원준이 친구의 답안지를 대신 써주었던 대리 시험, 인조 시대 윤응빙이 남의 답안지를 훔쳐 1등을 차지했다가 온 가족이 변방으로 쫓겨난 사건은 개인의 일탈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시험관들이 부패하기 시작했고, 광해군 시대에는 채점 조작이 워낙 극심하여 합격자 전체를 무효로 하자는 '파방(罷榜)' 논의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의 열차가 종착역에 다다른 조선 말기 고종 시대에는, 급기야 국가가 대놓고 '100명을 더 선발하여 2만 냥씩에 매도하라'며 과거 합격증에 정가표를 붙여 장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공명정대의 최후 보루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완전히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 무너진 사다리가 남긴 경고


제도가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되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 결국 다른 무언가로 변질되고 맙니다. 조선시대 과거 제도는 분명 훌륭한 실력주의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합격만 하면 평생의 부와 권력이 보장되는 구조와, 군자의 도덕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지식인들의 위선이 숨막히게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시험관이 답안을 유출하고, 권력에 밀려 정당한 합격이 취소되며, 돈으로 합격증을 사고파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조선의 백성들은 더 이상 국가의 공정함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정한 사다리에 대한 사회적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국가는 그 생명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그 현장은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제2부. 소매 속의 컨닝페이퍼와 초유의 집단 재시험 사태


먼저 한 가지를 짚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 시험장을 상상할 때, 흔히 조용하고 엄숙한 오늘날의 시험실을 떠올립니다.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놓인 실내, 감독관의 날카로운 시선, 연필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정적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과장, 科場)의 풍경은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한양에서 치러지는 시험의 응시자는 100여 명 남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과거에 목을 매는 양반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습니다. 정조 시대의 별시 기록을 보면 시험장에 입장한 유생만 7,200여 명이었고, 구경꾼과 하인들까지 합치면 1만 명이 훌쩍 넘는 인파가 운집했습니다. 또 다른 정시(庭試) 기록에서는 임금이 '과장에 들어온 응시생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승지가 '그 수가 1만 2천 명입니다'라고 보고할 정도였습니다.


장소는 경복궁 근정전 뜰, 창경궁 춘당대, 모화관 같은 넓은 야외 공터였습니다. 오늘날의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수험생 1만 2천 명이 빼곡히 들어찬 광경을 상상해 봅시다. 거기에 각자의 하인과 구경꾼들까지 더해진다면? 그것이 바로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원칙상으로는 응시자 간 거리를 6척(약 1.8미터)씩 띄워 앉히고 이동 시 대간에게 신고하도록 하는 엄격한 통제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만 명이 몰려드는 판에 이 규칙은 그야말로 휴지조각이었습니다. 응시생들은 시험장에 들어올 때 짐을 드는 하인, 뙤약볕을 가려주는 일산을 든 노비 등을 서너 명씩 대동하고 나타났습니다. 명당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복들끼리 몸싸움을 벌이고 곳곳에 장막을 치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응시생들이 비를 피해 궁궐 행랑으로 우르르 몰려가 처박혔습니다. 시험지가 다 젖어 백지를 내고 포기하는 사람도 속출했습니다.


거대한 야외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환경이 온갖 부정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배경이었습니다.


1. 세종 시대의 경고 : 벼락치기와 표절, 그리고 '정거(停擧)' 처분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는 이미 세종(世宗) 시대부터 골칫거리로 등장했습니다. 성균관이나 향교의 유생들은 평소에는 고전을 깊이 강습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시험 날이 닥치면 허둥대기 일쑤였습니다. 학문의 깊이가 없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답안을 작성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이 택한 방법은 꼼수였습니다.


품속이나 넓은 소매 자락 안에 작은 서책을 몰래 숨겨 들어와 펴보거나, 미리 외워둔 남의 훌륭한 글을 통째로 베껴 쓰는 표절이 만연했습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뒤엉킨 야외에서 감독관 몇 명이 소매 속을 일일이 뒤지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었으니, 이 정도는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겁니다.


세종은 이에 응시 자격 자체를 박탈하는 '정거(停擧)'를 제도화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몰래 책을 보다 발각된 자는 1식년(3년), 시험장 안까지 수험서를 숨겨 들어왔다 걸린 자는 2식년(6년) 동안 응시 자격을 정지시켰습니다. 양반에게 과거 응시 자격 박탈은 사회적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으니, 제도 시행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오래 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 성종 시대의 대참사 : 집단 컨닝과 초유의 재시험


세종의 엄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망은 제도의 통제를 비웃듯 계속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성종(成宗) 연간에 이르러서는 조선 과거사(史)에 길이 남을 집단 컨닝 사태가 터졌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살펴보았듯, 성종 7년(1476년) 감찰관 엄용선의 수색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응시자 가운데 책을 숨기지 않은 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원 유죄. 이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모두가 컨닝을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되어버린, 시험장 전체의 집단적 도덕 붕괴였습니다.


보고를 받은 성종은 당일 시험을 전면 무효화하고, 다음 날 처음부터 다시 시험을 치르도록 명했습니다. 조선 역사상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수백 명의 응시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무게를 실감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엄격한 법이 있어도, 감독 시스템이 느슨해지고 '남들도 다 하는데'라는 집단적 자기합리화가 퍼지는 순간 조직 전체가 순식간에 오염될 수 있음을 이 사건은 보여줍니다.


3. 족집게 베스트셀러의 등장 : 《동인초집》과 끝없는 숨바꼭질


세월이 흘러 조선 중후기로 접어들면서, 컨닝 수법도 어느새 상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수능 기출 요약집이나 족집게 교재 같은 것들이 수험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입니다.


숙종 10년(1684년), 조정은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행위를 엄금하면서 특정 서적의 이름을 콕 집어 명시했습니다. 바로 《동인초집(東人抄集)》이었습니다. 방대한 고전을 다 읽을 필요 없이 시험에 자주 나오는 명문장과 답안 틀을 요약해 놓은 이 책은, 당시 수험생들 사이에서 반드시 소매 속에 챙겨 들어가야 할 '필수품'으로 통했습니다. 조정이 이 책의 이름을 법령에 명시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유행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방증합니다.


숙종은 《동인초집》 밀반입 적발 시 3년간 응시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따르는 법입니다. 100여 년이 훌쩍 지난 영조 47년(1771년)의 기록에도 과거장에 서책을 밀반입하는 행위가 근절되지 않아 임금이 거듭 단속을 명해야 했다고 남아 있습니다. 왕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컨닝은 끝날 줄 몰랐습니다. 이 집요함이라면 차라리 공부에 써먹었어야 했습니다.


▶ 넓은 소매 속에 숨겨진 것


조선의 지배층은 겉으로는 넓고 우아한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공명정대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넓은 소매 속에는 권력을 향한 욕망과 함께 컨닝페이퍼가 들어 있었습니다. 거창한 철학과 도덕 정치를 논하던 사대부들의 이상향은, 시험 합격이라는 눈앞의 현실 앞에서는 그저 껍데기였습니다.


그나마 이것은 아직 '개인의 꼼수' 수준이었습니다. 컨닝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다른 사람을 대신 세웠습니다.




제3부. 대리 시험부터 답안지 훔치기까지 : 목숨을 건 범죄와 가혹한 형벌


컨닝이 개인의 꼼수라면, 대리 시험과 답안지 강탈은 시험 제도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범죄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는 이를 막기 위해 가장 잔혹한 형벌을 꺼내 들었습니다.


1. 천재의 엇나간 우월감 : 임원준의 대리 시험 사건 (세종 26년)


1444년(세종 26년), 한성부에서 실시한 과거 시험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적발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수재로 손꼽히던 임원준이 자신의 답안을 짓는 데서 그치지 않고, 친분이 있던 친구의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 주었다가 감독관에게 들킨 것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의 동기입니다. 뇌물을 받고 직업적으로 대리 시험을 쳐주는 브로커 같은 행동이라기보다는, 머리 좋은 청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우월감으로 별 죄의식 없이 우쭐대며 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나는 내 글뿐만 아니라 남의 글까지 대신 지어줄 수 있다'는 지적 허영심.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재능을 이런 방향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종의 판결은 서늘하리만치 냉혹했습니다. 임원준은 단 한 번의 대리 시험으로 '평생토록 다시는 과거를 볼 수 없다'는 영구 응시 자격 박탈 처분을 받았습니다. 눈물로 선처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끝내 외면했습니다. 공정한 사다리를 걷어차는 자는 그 사다리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준엄한 경고였습니다.


2. 훔친 답안지로 1등을 차지하다 : 윤응빙의 기만극 (인조 13년)


인조 대에 이르면 부정행위는 대리 작성을 넘어, 타인의 결과물을 통째로 강탈하는 수준으로 치달았습니다.


1635년(인조 13년), 수험생 윤응빙이 저지른 일은 조정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답안을 작성할 능력이 없자, 수만 명의 인파로 뒤엉킨 시험장의 혼란한 틈을 타 다른 응시자가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답안지를 몰래 훔쳤습니다. 그리고 그 훔친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만 바꿔 적어 제출했습니다. 그 담대함에는 말문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다음입니다. 훔친 글이 너무 뛰어나서 채점관들이 이를 1등(장원)으로 뽑아버렸습니다. 남의 글을 훔쳐 나라의 1등 인재로 둔갑한 이 사기극은 진짜 답안지 주인의 항의와 대간들의 조사 끝에 결국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잠시, 답안지를 도둑맞은 그 응시자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밤을 새워 공들여 쓴 글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자신이 받았어야 할 장원 자리는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가 항의하지 않았다면 윤응빙의 범행은 영영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진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 응시자가 잃어버린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조정은 윤응빙 본인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일가친척을 가장 험난한 국경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노비처럼 살게 만드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이라는 연좌제 형벌을 내렸습니다. 가문의 씨를 말리는 수준의 징벌이었습니다. 답안지 한 장이 집안 전체를 삼켜버렸습니다.


3. 대리 활쏘기와 대리 독해 : 조직화된 대리 시험의 등장 (인조 17년)


윤응빙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639년(인조 17년), 이번에는 개인의 일탈을 넘어 조직적이고 전문적인 대리 시험 카르텔이 무더기로 적발되었습니다. 문과와 무과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무과(武科) 시험에서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활과 칼을 찬 채 300보를 달려야 하는 등 극도의 체력과 무예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 험난한 시험을 직접 통과할 실력이 없었던 양반집 자제들은 활을 잘 쏘는 군관이나 하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자신을 대신해 과녁에 활을 쏘거나 300보를 대신 달리게 했습니다. 겉보기에 늠름하게 앉아 있는 응시자 뒤에서, 실제로 시험을 치르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뜻입니다.


문과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서삼경을 소리 내어 읽고 그 뜻을 해석해야 하는 강경(講經) 시험에서, 글을 모르는 자들은 학식 있는 선비를 몰래 대동하여 병풍 뒤나 장막 속에 숨겨 대신 경전을 낭독하게 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앞에서 답을 전달받는 현대판 대리 면접과 구조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방위적 대리 시험 사태가 적발되자, 조정은 대리 시험을 쳐준 자와 부탁한 자 모두에게 전가 사변을 적용하는 강력한 규정을 세웠습니다.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변방으로 보낸다는 것은, 사실상 '이것을 시도하다 걸리면 집안이 끝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 붕괴하는 신뢰, 예견된 비극


세종 시대 임원준의 대리 시험이 오만한 천재의 빗나간 영웅심이었다면, 인조 시대 윤응빙의 답안지 절도와 무더기 대리 시험 사태는 실력 없는 기득권층이 권력과 자본을 동원해 시험 제도를 능멸한 조직적 범죄였습니다.


조선은 봉미(封彌) 제도와 전가 사변이라는 가혹한 연좌제까지 동원하며 사투를 벌였지만, 시험을 속여 부당한 지위를 얻으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꼼수는 점점 더 교묘해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응시자가 아니라, 시험관 쪽에서 먼저 손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제4부. 공정의 심판관이 범죄자로 전락하다 : 채점 조작과 과장(科場)의 난장판


응시자 개인이 소매 속에 컨닝페이퍼를 숨기거나 대리 시험을 치르는 것은, 사실 그나마 봐줄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시험의 공정성을 지켜야 할 시험관들이 뇌물과 권력에 눈이 멀어 직접 판을 뒤집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수들이 경기 규칙을 어기는 것도 문제지만, 심판이 선수와 짜고 치는 경기는 그 자체가 이미 경기가 아닙니다.


1. 통제 불능의 무법지대 : 1만 명이 몰려든 야외 아수라장


권력형 비리가 싹틀 수 있었던 것은, 과장 자체가 처음부터 통제 불가능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수만 명의 인파가 야외 공터를 가득 채운 상황에서 채점을 주관하는 고위급 독권관(讀券官)은 보통 2~4명에 불과했습니다. 실무관원과 규찰 대간들을 다 합쳐도 수십~수백 명 수준. 감독관 한 명이 수백 명의 응시자와 그 하인들을 동시에 통제해야 했으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습니다.


이 틈을 타 조직적인 부정행위 카르텔이 시험장 안팎에서 가동되었습니다. 시험 문제가 내걸리는 순간 몸싸움을 뚫고 가장 빨리 문제를 베껴 담장 밖으로 던지는 '선접꾼', 담장 밖에서 문제를 건네받아 대신 훌륭한 답안을 지어주는 '거수(대필자)', 완성된 글을 다시 담장을 넘어 안으로 배달하는 '사수'까지 역할이 정교하게 분업화되어 있었습니다. 시험장 안팎에서 동시에 돌아가는 실시간 답안 배송 시스템이었습니다.


가장 공명정대해야 할 지식의 경연장이 결국 권력과 재력을 가장 많이 동원한 자가 이기는 투기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평생 홀로 글을 갈고닦아온 지방 선비들이 그 옆에서 하인 서너 명을 부리는 한양 권력가 자제들과 겨뤄야 했던 것입니다. 출발선부터 같지 않았습니다.


2. 심판의 배신 : 시험관 황기·김성구의 답안 유출과 등수 조작 사건


그런데 더 뿌리 깊은 문제가 따로 있었습니다. 합격의 당락을 직접 결정짓는 채점관들이 조직적으로 부정에 손을 댄 것입니다.


조선 조정은 채점의 공정성을 위해 나름의 치밀한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응시자의 이름이 적힌 부분을 접어 풀로 붙여 누군지 알 수 없게 하는 '봉미(封彌)' 규칙, 그리고 시험관이 필체를 알아볼 것을 막기 위해 사자관을 시켜 답안을 붉은 글씨로 다시 베껴 쓰게 한 뒤 그 사본으로 채점하는 '역서(易書)' 제도가 그것이었습니다. 꽤 촘촘한 설계였습니다.


그러나 한성시(한성부에서 치르는 과거)의 시관이었던 황기(黃機)와 김성구(金成九), 원수장은 이 모든 보안 시스템을 비웃듯 파괴했습니다. 이들은 평소 안면이 있거나 연줄이 닿은 응시자들에게 출제될 시험 문제를 사전에 통째로 유출했습니다.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합격자 전체의 석차까지 미리 자기들끼리 내정해 두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능 출제 위원장이 특정 재벌의 자녀에게 시험지와 정답을 미리 빼돌리고, 대학 합격증과 수석 자리까지 확정 지어 놓은 것과 같은 국가 범죄였습니다. 결국 이들의 범죄는 적발되어 곤장 80대와 직첩 압수라는 강력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시험관과 응시자의 유착은 이미 조선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3. "입이 있는 자는 모두 불공평을 말한다" : 광해군 12년, 파방 사태


광해군 12년(1620년), 과거 합격자가 발표되자 전국의 선비들이 격렬하게 들고일어났습니다. 당시 실록은 '과거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을, 무릇 입이 달린 사람들은 모두가 말하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실록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민심이 얼마나 들끓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이유는 명백했습니다. 시험관들이 오직 인맥과 뇌물에 얽매여 친인척, 같은 붕당의 자제들, 권세가에게 줄을 댄 자들만을 합격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지방 선비라도 줄이 없으면 탈락하는 구조적 부패가 이제는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조정에서는 합격자 발표 전체를 무효로 하는 '파방(罷榜)'을 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부정을 주도한 시험관들을 엄벌하고, 부당하게 합격한 자들의 이름을 명단에서 강제로 파내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겉으로 표방하던 실력주의가 붕괴되고, 학연·지연·혈연이라는 낡은 카르텔이 인재 등용의 문을 완전히 장악해버렸음을 만천하에 선포한 사건이었습니다.


4. 정약용의 사직서 투척 : 시골 무사를 향한 기득권의 교묘한 갑질


정조 시대로 넘어오면, 권력층의 시험 조작 방식은 노골적인 뇌물 수수를 넘어 훨씬 더 교묘하고 합법을 가장한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사헌부 지평으로 훈련원 무과 시험을 감찰할 때 목격했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합격권에는 무예가 출중한 지방 출신 무사들과, 무예는 형편없지만 한양 유력 군사 가문 출신의 자제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실력만 보면 당연히 평생 활과 창을 연마한 시골 무사들이 합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양의 시험관들은 지인의 자제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교묘한 꼼수를 썼습니다.


병학 이론을 묻는 강론 시간이 되자, 시골 무사들에게는 당대 학자들도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병서 《삼략(三略)》의 가장 구석진 문장을 질문하여 고의로 대답을 못 하게 막았습니다. 반면 선이 닿아 있는 한양의 양반 자제들에게는 미리 준비해 둔 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이 면접을 치른 것이지만, 내용은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억울하게 탈락할 뻔한 시골 무사들이 있었습니다. 평생 몸 하나만 믿고 활을 쏘고 칼을 갈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줄이 짧으니 병서의 난해한 구절 앞에서 입을 열 수 없었고, 그것이 불합격의 이유가 될 판이었습니다.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정약용은 참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시정을 요구했으나 시험관들이 묵살하자, 상소용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한 뒤 '시험관이 사사로운 정을 좇아 국가의 인재를 버리는데도 이를 막지 못하니, 나는 당장 이 감찰관 직을 사직하겠다'라며 사직서를 집어 던지고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는 정약용이 직접 나섰다는 사실에 혼비백산한 시험관들은 납작 엎드려 사과했고, 그제야 억울하게 떨어질 뻔했던 지방 무사들이 대거 합격증을 쥘 수 있었습니다. 만약 정약용 같은 꼿꼿한 감찰관이 없었다면, 조선의 군대는 실전 경험이 뛰어난 무사 대신 한양 귀족 자제들로 채워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군대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조선 후기의 역사가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 무너진 사다리가 잉태한 씨앗


시험관들이 답안을 유출하고, 한양의 기득권들이 시골 무사들을 교묘히 배척하며, 국가가 당파의 이익을 위해 합격증을 조작했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 가슴속에는 체제에 대한 절망이 조용히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밤을 새워 글을 읽고 무예를 갈고닦아도 권력자의 뒷배나 막대한 뇌물이 없으면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열심히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사회에서, 제도는 이미 그 뿌리를 잃고 있었습니다.




제5부. 국가적 타락 : 구조적 꼼수와 '국가 주도 매관매직'의 막장


개인의 컨닝, 대리 시험, 시험관의 채점 조작. 이 모든 비리가 켜켜이 쌓이면서 과거 제도는 마침내 더 큰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개인이나 일부 시험관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 자체가 특정 계층에게 구조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거나, 심지어 국가가 직접 합격증을 돈 받고 파는 막장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1. 원칙 163번, 예외 581번 : 서울만의 전용 리그


국가가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주는 가장 교묘한 방법은 제도의 '예외'를 일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문과 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에 한 번 치러지는 식년시(式年試)가 기본이었습니다. 지방에서 향시를 거쳐 전국 팔도의 인재들에게 고른 기회를 주는 합리적인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통계가 잔혹한 진실을 말해줍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정기 시험인 식년시는 단 163회 치러진 데 반해, 증광시·별시·알성시 등 각종 명목을 붙인 비정기 임시 시험은 무려 581회나 치러졌습니다. 원칙이 163번, 예외가 581번.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큰 기형적인 구조였습니다.


이 비정기 시험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지방 예선인 향시를 생략하고 한양에서 기습적으로 치러졌다는 점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내일 알성시를 치르겠다'고 명하면 함경도나 경상도 산골의 지방 선비들은 시험이 열린다는 소식조차 몇 달 뒤에야 듣게 되었습니다. 설령 일찍 소식을 들었다 해도 봇짐을 싸고 한 달을 걸어 한양에 도착하면 이미 합격자 발표까지 마친 뒤였습니다.


결국 이 581회의 비정기 시험은 한양의 고위 관료 자제들, 즉 '서울 카르텔'을 위한 전용 리그로 전락했습니다. 겉으로는 실력주의를 표방하면서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해 지방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원천 봉쇄해버린 이 구조적 꼼수는, 조선 사회를 서울 양반 중심의 폐쇄적 고인 물처럼 썩어가게 만든 독약이었습니다.


2. 정치가 실력을 짓밟다 : 노론의 억지와 '조진도 삭과(削科)' 사건


운 좋게 실력으로 급제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휴지조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조 시대에 발생한 조진도 합격 취소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던 초기, 조진도라는 인물이 당당히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할아버지 조덕린은 집권당이었던 노론(老論) 대신들을 맹렬히 비판하다가 귀양을 가 객사한 소론 강경파 인물이었습니다. 조진도 본인이 무슨 잘못을 했겠습니까. 그저 할아버지를 잘못 만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노론 세력은 정적의 손자가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우리 당파를 비판한 인물'이라는 억지 연좌제 논리를 내세우며 합격 취소를 강요했습니다. 사도세자도 부당하다며 거부했지만, 노론의 압력을 받은 영조는 결국 조진도의 합격을 강제로 취소시키는 삭과(削科)를 명하고 말았습니다.


응시자의 탁월한 실력도, 시험관의 공정한 채점도 당파 싸움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인재 등용의 공정한 잣대여야 할 과거 시험이 정권의 린치 도구로 전락한 순간이었습니다.


3. '2만 냥'에 팔려 나간 국가의 영혼 : 국가 주도 매관매직의 끝판왕


개인적 비리, 구조적 차별, 정치적 개입을 거쳐 썩어들어가던 과거 제도는 조선 말기 고종 시대에 마침내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고 말았습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의 극한 속에서 국가 재정은 파탄 났고, 권력자들은 아예 대놓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을 일삼았습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비롯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국 수령의 3분의 2가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85년(고종 22년, 을유년) 식년 생원·진사 회시 때 벌어졌습니다.


당시 조정은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전대미문의 공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번 과거에서 100명을 추가로 더 선발하되, 급제증을 2만 냥씩에 매도(賣渡)하라."



암암리에 뇌물을 주고받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스스로 브로커가 되어 과거 합격증에 2만 냥이라는 정가표를 붙여 시장에 내놓은 것입니다. 조용히 눈 감아주는 것도, 뒤로 봉투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가격표'가 생긴 것입니다.


시험 감독관들은 누가 2만 냥을 냈는지만 확인했고, 돈을 낸 자의 답안지는 백지이거나 아무 의미 없는 글이 적혀 있어도 장원급제로 조작되었습니다. 평생 뼈를 깎는 고통으로 글을 읽으며 국가에 헌신하려 했던 진짜 선비들은 이 참담한 광경 앞에서 붓을 꺾고 통곡했습니다. 공정함의 상징이었던 과거 시험이 매매 계약서로 전락했을 때,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국가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습니다.


▶ 제도의 끝, 나라의 끝


개인의 꼼수에서 시작된 부패는 시험관의 조작을 거쳐, 마침내 국가 스스로 공모자가 되는 지점까지 흘러왔습니다. 이 흐름은 우연이 아닙니다.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그 방향으로 흐릅니다. 조선의 과거 제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6부. 무너진 인재 등용 시스템, 망국의 전조가 되다


조선 과거 시험의 역사는 오랜 부패의 연대기입니다. 소매 속의 컨닝페이퍼에서 시작해, 대리 시험과 답안지 절도, 시험관의 채점 조작과 파방 사태, 비정기 시험 남발로 인한 기회 차별, 당파적 합격 취소, 그리고 2만 냥짜리 합격증 판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건은 조선이라는 국가 유기체가 내부로부터 어떻게 서서히 무너져 내렸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긴 내력서입니다.


인재 등용 시스템이 부패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2만 냥을 빚내어 과거에 합격하고 수령의 자리에 앉은 자가 선정을 베풀 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짰고,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의 분노는 홍경래의 난, 진주 민란, 동학 농민 운동으로 폭발했습니다. 부패한 과거 제도가 잉태한 필연적인 역사의 반작용이었습니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 이전에, 이미 불공정이라는 내부의 암세포로 스스로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400년 전에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로스쿨 입시 비리, 공공기관 채용 청탁, 유명 대학 입시 부정. 뉴스에서 심심찮게 마주하는 이 사건들은 조선시대 과거장의 풍경과 구조적으로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합격증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동원되는 인맥과 자본, 그리고 그 앞에서 무너지는 공정함의 원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공정해야 할 사다리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무너졌을 때, 그 나라는 생명력을 잃기 시작합니다. 1476년 봄 과거 시험장에서 엄용선이 수험생들의 소매를 뒤지던 그 장면이, 어딘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면 — 그 서늘함이 이 글이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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