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미터 담장을 넘고 60킬로그램 쇳덩이를 든 인간 병기들의 잊힌 역사
1654년, 흑룡강.
유럽 대륙 끝에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동쪽 끝까지 건너온 러시아 병사들 앞에, 조선군 조총수 100여 명이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방아쇠가 당겨졌습니다. 일제 사격이 끝난 뒤, 현지 나나이족 사이에서 이런 말이 퍼져 나갔습니다.
‘머리 큰 사람(大頭人)들이 두렵다.’
그 소문은 이내 러시아군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조선군이 쓰던 전립 모자의 넓은 챙 때문에 머리가 유난히 커 보였던 것인데, 정작 조선군 본인들은 자기들이 '대두’로 불리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그저 쏘고, 또 쏘았을 뿐이니까요.
조선시대에 현대의 UDT나 특전사에 버금가는 특수부대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답은 명확합니다.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60킬로그램의 쇳덩이를 양손에 쥐고 70보를 걸어간 사람들. 30킬로그램짜리 철제 갑옷을 입고 약 380미터를 쉬지 않고 달린 사람들. 굶주림으로 쓰러지기 직전에도 3미터 높이의 담장을 맨몸으로 뛰어넘어야 겨우 입대 자격을 얻었던 사람들. 기록에 따르면 14만에 달하는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도 웅크리지 않고 50명만 데리고 북문을 열고 나가 기습을 감행한 사람들.
지금 읽으시면서 ‘에이, 설마’ 하셨을 겁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는 조선의 이미지는 하얀 도포를 두른 선비가 사서삼경을 읊고, 조정의 문신들이 당쟁과 예송 논쟁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입니다. ‘숭문천무(崇文賤武)’, 글을 높이고 무예를 낮추는 성리학 이데올로기 탓에 조선의 군사력은 으레 나약했을 것이라는 편견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조선 = 문과 왕국’이라는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잠깐 지도를 펼쳐 보겠습니다. 한반도는 북으로 몽골과 여진의 기마 군단이 쏟아져 내려오고, 남으로 왜구와 사무라이들의 칼날이 들이닥치는 동아시아 최고의 분쟁지대였습니다. 그리고 위협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건국 초, 경상도에서만 1년에 수백 명이 호랑이에게 목숨을 잃었고, 한양 도성 안팎에서도 맹수가 출몰할 정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출근길에 호랑이를 마주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방이 전쟁 고수들로 둘러싸이고 맹수마저 들끓는 그 한복판에서 단일 왕조가 500년을 버텼습니다. 붓만 들고 살았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참고 — 사실 특수부대 전통은 조선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고려의 삼별초(三別抄)는 도적 잡는 순찰대로 시작해 수도경비대·친위대·특공대까지 진화한 최정예 집단이었고, 별무반(別武班)은 여진 기병에 계속 치이자 '우리도 기병 만들자’며 조직한 다목적 특수부대였습니다. 요컨대 한반도는 예로부터 특수부대가 필요한 지정학적 위치였습니다. 지금도 그 지정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뽑혔고, 어떻게 싸웠으며, 왜 결국 역사에서 지워졌는지를 하나씩 해부해 보겠습니다. 시계를 가장 먼저 조선 건국 초기로 돌려 보겠습니다.
태종과 세종의 시대. 이 시기의 조선은 고려 말 혼란을 전쟁으로 극복하고 세워진 신생 무장 국가였습니다. 창업 군주 이성계부터가 동아시아 최고의 활잡이이자 기병 전술의 대가였고, 세종은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방의 4군 6진을 개척했습니다.
이 시대의 정예병 선발 기준을 보면, '선비의 나라’라는 고정관념은 5초 만에 부서집니다.
갑사는 문자 그대로 '갑옷 입은 무사’입니다. 왕을 호위하는 친위대에서 출발해 조선 전기 중앙군의 핵심 충격 보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주말에만 훈련하는 예비군이 아니라, 전투가 본업인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갑사 선발 기준 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이 '풀무장 300보 주파’였습니다. 무거운 철제 갑옷과 활, 환도를 갖춘 완전 군장 상태로 300보를 쉬지 않고 달려야 했습니다. 조선시대 1보는 주척 6척, 약 1.25미터이므로 300보는 약 375미터. 철제 갑옷 무게만 15~20킬로그램에 장비까지 합치면 총 25~30킬로그램을 온몸에 두른 채 380미터 가까이를 전력 질주하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대형마트에서 20킬로그램짜리 쌀포대를 하나 들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무겁죠. 그걸 등에 짊어지고 운동장 한 바퀴를 전력으로 뛰어 보면 됩니다. 갑사는 그 쌀포대 하나 반을 쇠붙이로 온몸에 감은 채 뛰었습니다. 현대 육군 특급 전사 기준의 완전 군장 달리기가 20킬로그램 수준이니, 갑사는 거기에 쇳덩이 10킬로그램을 더 얹은 셈입니다.
그리고 이건 입학시험입니다. 합격한 뒤가 아니라, 합격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습니다.
달리기만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완력이 뛰어나 혼자서 3~4명을 제압하는 자’를 1등급으로 선발한다고 규정에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철갑을 두르고 380미터를 전력 질주한 직후, 곧바로 격투 능력까지 증명해야 했습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상태에서 '자, 이제 싸워 보세요’가 기다리는 셈이었습니다. 요즘 군대 체력검정으로 치면 3킬로미터 달리기 끝나고 바로 종합격투기 링에 올리는 느낌이랄까요.
갑사가 돌격의 창이었다면, 방패는 그 창을 지키는 방어의 벽이었습니다. 최전선에서 적의 기병 돌격과 화살비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쇠 같은 완력과 버티는 근성이었습니다. 방패군 선발 시험의 핵심은 두 손에 각각 50근(약 30킬로그램), 양손 합쳐 60킬로그램의 쇳덩이를 들고 70보를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무식한 요구인지 체감이 안 되시는 분들을 위해 비교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헬스장에서 양손에 30킬로그램짜리 덤벨을 하나씩 쥐고 제자리에 서 있어 보시면 압니다. 수십 초 안에 전완근이 비명을 지릅니다. 현대 크로스핏 대회의 파머스워크(Farmer’s Walk) 종목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양손 합쳐 약 130킬로그램을 들고 걷긴 합니다만, 그건 수십 미터를 걷는 것이고 과학적으로 훈련된 전문 운동선수의 이야기입니다. 별도의 체력 훈련 시설도 영양 보충제도 프로틴 쉐이크도 없던 시대에 60킬로그램을 쥐고 80미터 이상을 걸어가는 것이 방패군 입대의 첫 번째 관문이었습니다.
왜 이런 시험을 요구했을까요? 전장에서 거대한 목제 방패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는 환도를 휘두르며 적의 기병 돌격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방패를 놓치는 순간, 뒤에 있는 궁수와 창병 전체가 짓밟힙니다. 손가락 관절이 끊어지더라도 손잡이를 쥐고 있어야 했습니다. 시험이 잔인한 게 아니라, 전장이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근력 테스트가 끝나면 쉴 틈도 없이 물시계 시간 안에 230보를 달리는 스피드 테스트가 기다렸습니다. 60킬로그램을 들어 탈진된 근육으로 다시 전력 질주를 요구하는, 잔인하면서도 실전에 충실한 검증이었습니다.
참고 — 갑사의 적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착호갑사(捉虎甲士)
갑사 1,800명 중 무려 440명이 별도로 차출되어 호랑이와 표범을 잡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착호갑사입니다. 조선 건국 초 경상도에서만 1년에 수백 명이 호환으로 목숨을 잃었고, 한양 도성 안팎에서도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 시내에 맹수가 돌아다니는데 119 대신 갑사를 부르는 셈이었습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착호갑사 선발은 선택형 시험이었습니다. 목전(木箭) 180보 사격, 기사(騎射), 기창(騎槍), 250보 달리기, 양손에 각각 50근(약 30kg)씩 들고 100보 이상 걷기 — 이 가운데 하나에만 합격하면 되었습니다. 방패군이 근력과 달리기를 연속으로 통과해야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조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호랑이 2마리를 화살과 창으로 직접 잡아 본 자는 시험을 전부 면제하고 곧바로 배속시켰습니다. 호랑이를 잡아 본 경험이 어떤 필기·실기 시험보다 확실한 검증이었던 것이죠. 요즘으로 치면 '관련 분야 실무 경력 2년 이상이면 필기 면제’쯤 되겠습니다. 다만 그 '실무’가 호랑이 사냥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포상 체계도 철저했습니다. 대호(大虎)를 선착순으로 명중시키면 근무일수 50일을 추가 인정받았고, 1년에 10마리 이상 잡은 수령은 품계가 올랐습니다. 향리나 천인이라도 자진해서 1년에 5마리를 잡으면 신역이 면제되었습니다. 호랑이 앞에서는 족보가 아니라 담력과 기술만이 생존을 갈랐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보급되면서 착호갑사는 서서히 역할을 잃었고, 17세기 이후에는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포수들이 맹수 사냥 임무를 대신하게 됩니다.
15세기 한양 훈련원의 연병장을 잠깐 상상해 보겠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몰려온 수백 명의 장정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땀 냄새가 흙먼지와 뒤섞입니다. 천한 신분을 벗어나고 싶은 양인 농부도, 몰락한 무반 가문의 자제도 있습니다. 이 연병장이야말로 온몸을 갈아 넣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였습니다.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장 열기 같은 것이었을까요? 비슷하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징이 울리면 무거운 찰갑을 입은 사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튀어나갑니다. 100보를 지날 무렵 갑옷은 어깨를 바위처럼 짓누르고, 200보를 넘어서면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는 자들이 속출합니다. 쓰러지면 탈락. ‘여기서 넘어지면 처자식이 영원히 굶는다.’ 그 일념 하나로 핏발 선 눈을 들어 결승선을 노려봅니다. 체력장의 탈을 쓴 생존 심사였습니다. 조선의 가장 위험한 전선에 설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국가가 주관하는 가장 잔혹한 서바이벌이었습니다.
세종 대까지 이 혹독한 기준 덕분에 조선의 국방은 굳건했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지속되자 지배층 사이에서 숭문천무 사상이 병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효종 대에 이르면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미치고 패악스럽다고 지목하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임금의 탄식이 실록에 남을 정도였습니다. 운동 좋아하는 군인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나라. 뭔가 단단히 꼬이기 시작한 겁니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선발 체계 자체가 썩어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체력 시험을 통과할 능력도 의지도 없던 양반집 자제들은 힘센 노비나 군관을 돈으로 매수해 대신 뛰게 하고, 대신 무거운 활을 쏘게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펙 세탁’의 조선판이었습니다. 대리 시험을 돈 주고 맡기는 발상,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인간은 참 안 변합니다.
인조 17년(1639년) 대리 시험이 무더기로 적발되자 조정은 극약 처방을 내렸지만 부패는 쉽게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수만 명의 군사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녹슨 창도 제대로 쥐지 못하는 유령 군대만 남았습니다. 엑셀 시트에만 존재하는 인력. 이것도 어딘가에서 많이 보신 풍경 아닌가요?
그리고 그 대가는 반드시 찾아왔습니다.
1592년 봄, 일본군의 조총 소리가 부산포에 울려 퍼졌습니다. 한 달 뒤 한양이 함락되었습니다. 붕괴된 국방 시스템을 다시 세우려는 조선의 절박한 실험이 시작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은 조선 국방 체계에 대한 파산 선고였습니다. 약 120년간 이어진 전국시대의 내전을 거치며 살인 기계로 단련된 일본 사무라이들 앞에, 오래 농사만 짓다 억지로 징집된 조선 농민병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졌습니다. 탄금대에서 신립의 기병대가 전멸하고 국왕이 도성을 버리자, 기존 방어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습니다.
이 절망적인 붕괴 속에서 영의정 류성룡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징집병으로는 안 된다. 오직 전투만을 업으로 삼는 프로 직업군인이 필요하다.’ 그 각성이 1593년 10월 조선 최초의 상비 특수 군영, 훈련도감의 창설로 이어졌습니다.
훈련도감은 포수·살수·사수의 세 병과로 구성된 삼수군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포수(砲手)는 조총으로 원거리 화망을 구축하는 화력 제압조, 살수(殺手)는 장창과 환도로 포수의 재장전 공백을 메우며 근접 백병전을 담당, 사수(射手)는 활로 포물선 사격을 가해 두 병과의 빈틈을 채웠습니다.
세 병과는 따로 싸우지 않고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습니다. 포수가 쏘고 물러나면 사수가 화살로 틈을 메우고, 적이 달려들면 살수가 고슴도치처럼 창을 내미는 방식이었습니다. 현대 군사학에서 '제병협동(Combined Arms)'이라고 부르는 전술을, 조선이 400년 전에 교범도 없이 실전에서 굴려 본 셈입니다.
이 혹독한 훈련의 동력은 단 하나였습니다.
월급. 한 달에 쌀 6말.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에서 보수를 받는 직업 군인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전 국토가 전화에 짓밟혔고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는다는 기록이 속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지옥도 속에서 '매달 쌀 6말’은 가족이 굶어 죽지 않을 유일한 생명줄이었습니다. 양반, 평민, 천민, 심지어 승려까지 너도나도 훈련도감 문을 두드렸습니다. 법당을 잠시 뒤로하고, 일단 먹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거창한 애국심 이전에,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몰려드는 인파와 달리 입구는 좁았습니다. 지원자들은 먼저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돌을 든 직후,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다음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 한 길(약 3미터) 높이의 담장을 단숨에 뛰어넘어라.’ 바위를 든 채로, 지금 당장.
잠깐, 3미터가 얼마나 높은지 감이 잘 안 오실 수 있습니다. 일반 아파트 천장 높이가 2.3미터입니다. 그보다 70센티미터나 더 높은 담장을, 바위를 든 상태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몸으로 뛰어넘는 겁니다. 영양 상태가 최악이었던 당시 지원자들에게 이 복합 테스트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차례를 기다리다 굶주림으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최종 합격률은 지원자의 1~2할, 10명 중 한두 명에 불과했습니다.
살아남은 10%는 이미 달라져 있었습니다. 쌀 6말에 목숨을 걸고 인간의 한계를 뚫어낸, 조선 건국 이래 가장 무서운 전투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이 연달아 덮쳤습니다. 이번에는 조총이 아니라 청나라의 기마 군단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한 번 더, 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청나라의 정예 기병 앞에서 기존 시스템이 다시 무너지자, 인조 대의 조선 조정은 신분제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결단을 내립니다. 공노비든 사노비든, 출신이 어떠하든 오직 '강한 신체와 전투 기술’만 있다면 국가의 정예병으로 발탁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영군(御營軍)과 별포군(別砲軍)의 탄생 배경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런 겁니다. ‘학력 무관, 경력 무관, 출신 무관.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합니다.’ 채용 공고에서 가끔 보이는 이 문구를, 조선이 400년 전에 총칼이 오가는 전장에서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어영군의 선발 기준은 단호했습니다. 총을 원하는 자는 총 솜씨로, 활을 원하는 자는 활 솜씨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무거운 모래주머니와 돌덩이를 들게 하여 근력과 담력을 평가했고, 양반이든 노비든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선발된 4천여 명은 체격이 장대하고 솜씨가 뛰어나, 당시 조정 안에서조차 대놓고 '정예병(精銳兵)'이라 불렸습니다. 평소라면 길거리에서 채찍질을 당해야 했을 노비들이 국가의 최정예 요원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어제까지 상전의 밭을 갈던 손이, 오늘은 조총의 방아쇠를 쥐었습니다.
1627년 김류의 건의로 창설된 별포군은 조총 전문 특수부대였습니다. 조총이라는 무기는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궁술은 십수 년의 수련이 필요했지만, 조총은 몇 주의 집중 훈련만 받으면 평생 낫질만 하던 노비도 두꺼운 갑옷을 입은 청나라 기마병을 한 발로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총알은 족보를 읽지 않습니다. 총구 앞에서는 양반의 명분도, 노비의 천함도 없었습니다. 조총은 무기인 동시에, 신분제의 벽에 뚫린 최초의 구멍이었습니다.
어영군과 별포군의 실험은 영웅 서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란이 지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어쩔 수 없이 노비에게 무기를 쥐여주었던 양반 사대부들의 기득권이 다시 발동했습니다. '강상(綱常)이 무너진다’는 명분 아래 전공을 세운 노비들의 면천 약속은 흐지부지되거나 취소되었습니다.
나라가 가장 위태로울 때 목숨을 걸고 총을 쏘았던 이들이, 위기가 지나자마자 다시 상전의 채찍 앞에 서야 했습니다. 위기 때만 문을 열었다가 평화가 오면 닫아버리는 이 패턴은 조선 군사 시스템의 가장 뼈아픈 반복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특수부대들은 실전에서 실제로 어떤 성과를 냈을까요? 역사 기록 속에는 꽤나 통쾌한 장면들이 남아 있습니다.
세종 15년(1433년), 압록강 이북의 여진족이 다시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세종은 도원수 최윤덕에게 명했습니다. 정예병을 이끌고 파저강 깊숙이 치고 들어가라. 전장은 혹독한 북방의 산악 지대였습니다. 쉽게 돌아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최윤덕 휘하의 정벌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여진족 근거지를 동시에 타격했습니다. 총사령관 최윤덕이 이끄는 본대가 남녀 62명을 생포하고 98명을 참수했고, 좌군절제사 최해산, 조전절제사 이징석, 김효성 등이 이끄는 분대들이 각 방면에서 추가 전과를 올렸습니다. 정벌군 전체로는 수백 명의 여진족을 생포·참수하고 말과 소를 대량으로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원정의 성과가 쌓이고 쌓여,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4군 6진의 영토가 확보되었습니다. 선발 시험에서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뛰게 한 이유가, 여기서 답이 나옵니다.
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에 고립되었습니다. 성 안의 조선군 1만 2천에서 1만 8천 명, 성 밖의 청나라 군대는 당시 기록에 따르면 14만 명에 달했습니다. 수적으로는 이미 결론이 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영부사 원두표는 웅크리지 않았습니다. 정예병 50여 명만을 이끌고 북문을 열고 나가 청군 진영을 기습했습니다. 14만 대 50. 누가 봐도 무모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던 청군은 당황했고, 조선군은 적 6명을 살상하며 산성으로 귀환했습니다. 이 기습 이후 12월 19일부터 23일 사이, 어영별장 이기축 등이 이끄는 유격전이 연이어 펼쳐져 청군 100여 명을 추가로 살상했습니다.
전과 자체가 전쟁의 판도를 뒤집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포위망 속에서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갔다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성 안의 조선군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불을 켠 것은 50명의 담력이었습니다.
조선 특수부대의 전과 중 가장 통쾌한 장면은 정작 조선 땅 밖에서 벌어졌습니다. 청나라가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러시아 차르국과 충돌하자, 조총 사격술이 뛰어난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동맹국이 '너희 저격수 좀 보내줘’라고 요청한 셈이었습니다.
1차 정벌(1654년)을 이끈 변급 장군은 조총수 100여 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변급은 무턱대고 강으로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군의 강점과 약점을 냉정하게 따졌습니다. 러시아군은 체격이 우수하고 선박을 이용한 수상전에 능했지만, 조선군의 강점은 정밀한 조총 사격이었습니다. 변급은 육지에 통버드나무로 엮어 만든 거대한 방패 '유붕(柳棚)'을 길게 세워 차단막을 쳤습니다. 적의 시야를 가리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술적 방어선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방탄 가림막 뒤에서 일방적으로 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러시아 함선이 유붕 앞으로 접근하자, 조선의 조총수들이 일제히 화망을 펼쳤습니다. 흔들림 없는 집중 사격에 막대한 사상자를 낸 러시아군은 흑룡강을 거슬러 도망쳤습니다. 우리역사넷의 기록에 따르면, 변급은 인명 손실 없이 조선 조총부대를 거느리고 개선했습니다. 100명이 싸워서 사상자 0명. 현대 군사 작전에서도 보기 드문 완벽한 전과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현지 나나이족 사이에서 조선군을 '머리 큰 사람(大頭人)'이라 부르는 말이 퍼졌습니다. 조선군이 쓰던 전립 모자의 넓은 챙 때문이었는데, 이 별명은 나나이족과 교류하던 러시아군에게도 전해졌습니다.
4년 뒤 러시아 세력이 다시 남하하자, 청나라는 재차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혜산진첨사 신류가 조총수 200명을 이끌었습니다. 2차 정벌은 1차보다 규모가 컸고, 전투도 치열했습니다.
청나라 총지휘관 샤르후다는 전선 한 척마다 조선 포수 5명씩을 배치하고, 러시아 함대를 수상에서 요격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아무르강 위에서 러시아 범선 11척과 맞닥뜨린 조청 연합 함대는 일제 사격과 화공으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켰습니다. 러시아 측 생존자 페트릴로프스키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휘관 스테파노프를 포함한 카자크 270명이 전사했고, 대포 6문과 군수물자를 실은 선박이 파괴되었습니다. 겨우 배 한 척에 생존자 95명만 태우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1차 정벌과 달리 2차 정벌에서는 조선군도 대가를 치렀습니다. 전사 8명, 중상 25명. 적선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흘린 피였습니다. 길주의 윤계인,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 그들의 이름이 겨우 남아 있는 것은 신류가 쓴 『북정일기』 덕분입니다. 그러나 병사 수도 적고, 낯선 땅이었고, 상대는 유럽의 군사 강국이었습니다. 두 차례 모두 러시아 원정대를 궤멸시킨 것은 동아시아 파병 역사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 중 하나입니다.
나선정벌의 실전 경험이 축적되면서, 조선 후기에는 더욱 고도화된 화기 전담 특수부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훈련도감 포수가 '개인 화기 전문가’였다면, 이들은 한 차원 위의 '대형 화기와 폭발물 전문가’였습니다.
별파진이라는 이름은 직관적입니다. '별(別)'은 특수 부대임을, '파진(破陣)'은 적의 진형을 깨부순다는 의미입니다. 이름부터가 '나는 적진을 박살 내는 사람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별파진은 특정 군영만의 부대가 아니라 어영청(160인), 수어청(385인), 총융청(100인), 금위영(160인) 등 여러 중앙 군영에 배속되었습니다. 각 군영에서 극소수만 선발되었다는 점이 이들의 위상을 말해 줍니다.
이 극소수가 맡은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폭파 전문조(EOD)였습니다. 질려포나 비격진천뢰 같은 특수 폭발물을 다루고 적진 가까이 투척·설치하는 임무였습니다. 화약은 조금의 마찰이나 불꽃, 습기에도 오발 사고를 일으키는 극히 불안정한 물질이었습니다. 실수 한 번이 아군 전체를 날릴 수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안전핀 뽑힌 수류탄을 주머니에 넣고 적진까지 걸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들의 전신이 보여준 위력을 증명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1592년 9월, 임진왜란이 터진 그해. 경상좌병사 박진이 일본군에 빼앗긴 경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모았습니다. 이때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시한폭탄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대완구라는 화포에 실려 성 안으로 날아 들어갔습니다.
땅에 떨어진 것은 그저 둥근 쇳덩이처럼 보였습니다. 안에서 치직치직 소리가 나긴 했지만. 신기한 물건을 본 일본군 병사들이 하나둘 몰려들었습니다. ‘저게 뭐지?’ 하는 표정으로 빙 둘러선 그 순간, 폭발이 일었습니다. 사방으로 날아간 쇳조각들이 밀집한 적들을 덮쳤습니다. 미지의 폭발물에 공포를 느낀 일본군은 경주성을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적의 호기심을 무기로 바꾼 이 쾌거는, 훗날 별파진이 계승하게 되는 화기 전문가 계보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둘째, 중화기 운용자였습니다. 천보총(千步銃)처럼 일반 병사가 다루기 어려운 대형 특수 화기를 담당했습니다. 무게가 무겁고 반동이 강해 압도적인 완력이 요구되었고, 적의 지휘관 저격이나 밀집 진형 분산이 주요 임무였습니다.
셋째, 야전 포병이었습니다. 불랑기포, 대완구 같은 대형 화포를 끌고 다니며 보병 진격 전 적 진지를 초토화하는 화력 지원을 전담했습니다.
별파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몸이 좋은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갑사나 방패가 극강의 체력을 요구했다면, 별파진은 여기에 화기 기술이라는 전혀 다른 역량이 더해졌습니다.
대형 화포를 쏘기 위해서는 사거리와 각도를 계산해야 했고, 화약을 다루기 위해서는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시간을 정확히 재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통을 안고 적진 가까이 접근하는 담력도 갖추어야 했습니다. 기술이 뛰어나되 겁이 많으면 쓸모가 없었고, 담력이 있되 계산이 틀리면 아군이 먼저 날아갔습니다. 수학은 되는데 배짱이 없는 사람도 안 되고, 배짱은 있는데 수학이 안 되는 사람도 안 되었습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사람이 각 군영에 100~160명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 극소수 편제가 그들 스스로에게 '국가가 인정하는 화력 장인’이라는 강렬한 정체성을 심어주었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통을 안고 적진 문턱까지 걸어 들어간 이들. 그들이 조선의 EOD였습니다.
이처럼 조선은 잘 훈련된 특수부대를 보유했고, 실전에서도 이겼습니다. 그런데 왜 나라 전체가 흔들렸을까요. 그 답은 병사들이 아닌, 그 위에 있던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뛰어난 체력과 사격술을 지닌 특수부대를 보유하고도, 왜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에 한 달 만에 수도를 내주었고, 병자호란에서 왕이 땅에 이마를 찧으며 항복해야 했을까요? 전장에서 이긴 병사들이 분명히 있었는데, 왜 나라는 졌을까요? 좋은 부품은 있었는데, 조립하는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손자(孫子)는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간섭하지 않아야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현장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명령을 내려 군대의 전투력을 옭아매는 행위를 엄히 경계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전장의 실상이나 무기의 특성은 전혀 모른 채 오직 성리학적 명분만으로 군대를 통제하려 들었습니다. 강화도가 난공불락이라는 과거의 성공 기억에만 의존하여 방어 체계를 허술히 했다가, 병자호란 때 하루아침에 함락당한 것이 그 결과였습니다. '예전에 됐으니까 이번에도 되겠지’라는 생각은, 전장에서든 비즈니스에서든 가장 빠른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의 5군영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문제는 이 다섯 군영이 각각 독립된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사시 통합 지휘를 할 단일 사령부가 없었습니다. 각 군영의 대장들은 서로 다른 상관에게 보고했고, 군영 간 병력 융통이나 합동 작전은 구조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한 회사에 영업팀이 다섯 개 있는데, 다섯 팀의 팀장이 서로 다른 부사장에게 보고합니다. 큰 프로젝트가 터지면 누가 총괄하나요? 아무도 모릅니다. 각자 자기 방식대로 뛰다가 결국 엉킵니다.
나선정벌에서 조선군 200명이 청나라 지휘관 샤르후다 아래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단일 지휘 체계 아래 놓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남의 나라 지휘관 밑에서는 잘 싸우는데, 자기 나라에서는 지휘 체계가 꼬여서 못 싸우는 아이러니. 병자호란 때 각지의 근왕병이 따로따로 올라오다 각개격파당한 것이 그 결과입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조총 전술을 극한까지 발전시켰고, 여진(후금/청)은 팔기군이라는 혁신적 편제를 통해 기마 궁수와 중장갑 보병을 하나의 지휘 체계로 통합했습니다. 두 세력 모두 실전 속에서 끊임없이 전술을 갈고닦았습니다.
조선도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도입하고 삼수군 전술을 개발하는 등 혁신을 시도했지만, 평화기에 접어들면 혁신의 동력이 급격히 사라졌습니다. 나선정벌 때 신류가 러시아의 수석식(부싯돌식) 총기를 보고 "화승 없이 쇠붙이와 부싯돌로 사격하는 것이 매우 신기하다"고 기록했습니다. 화승식에서 수석식으로의 전환은 당시 세계 군사 기술의 최전선이었습니다. 비 오는 날에도 쏠 수 있고, 불씨를 관리할 필요도 없는 혁명적 기술이었습니다.
신류는 샤르후다에게 거듭 간청해 러시아 총 한 자루를 전리품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총 한 자루는 조선 군사 기술 혁신의 씨앗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을 심을 토양이 조선에는 없었습니다. 총은 창고에 들어갔고, 혁신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장 뿌리 깊은 실패 요인은 4부에서 언급한 패턴의 반복입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위기 상황에서는 노비든 백정이든 실력만 있으면 특수부대로 발탁했지만, 평화가 찾아오면 기득권층은 낡은 신분제와 숭문천무 이데올로기로 회귀했습니다.
정조는 이 구조적 문제를 간파하고 장용영(壯勇營)이라는 국왕 직속 친위 군영을 창설해 군사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장용영은 즉각 폐지되었습니다. 만든 사람이 사라지니 만든 것도 사라진 겁니다. 개혁의 동력이 한 사람의 군주에게만 의존하고 시스템으로 정착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위기 때 열었던 문을 평화가 오자 도로 닫아버리는 조직은, 다음 위기가 왔을 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조선의 특수부대는 전장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소모품으로만 여겼던 시스템에 의해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병사는 이겼는데 나라가 진 이유는, 언제나 전쟁터 바깥에 있었습니다.
1654년, 흑룡강. 조선군 조총수들이 유붕 뒤에서 러시아 함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사상자 없이 완승을 거둔 그들을, 현지인들은 '대두인’이라 부르며 두려워했습니다. 4년 뒤 2차 정벌에서는 200명의 조총수가 러시아 함대를 수장시켰고, 8명의 전사자를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그들을 기다린 것은 훈장이 아니었습니다. 공식 기록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다시 무명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2차 정벌에서 전사한 길주의 윤계인,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 그 이름이 겨우 남아 있는 것은, 신류가 쓴 『북정일기』 덕분입니다. 신류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전사자 수 명’이라는 숫자로만 남았을 겁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무거운 바위를 들고 3미터 담장을 뛰어넘었던 훈련도감 포수의 이름이나, 남한산성에서 청군을 기습한 어영군 병사의 이름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수만 명의 군사 중 하나’, '전사자 몇 명’이라는 건조한 숫자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태와 무기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습니다. 오늘날 차가운 심해를 헤치며 침투하는 UDT 대원들, 칠흑 속에서 고공 강하를 감행하는 특임대원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 앞에서 땀을 흘리는 EOD 요원들은, 400년 전 흙먼지를 일으키며 380미터를 질주했던 갑사들, 60킬로그램의 돌을 양손에 쥐고 70보를 걸어갔던 방패들, 3미터 담장을 맨몸으로 뛰어넘었던 훈련도감 삼수군과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일은, 결국 우리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