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가 조작해 낸 희대의 색마 : 연산군의 진짜 기록

연산군 황음무도(荒淫無道) 논란의 진짜 민낯

by 연구소장

[프롤로그] 붓을 쥔 자들의 역사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적어도 승자가 쓴 역사는 그렇습니다.


1506년 11월, 강화도 교동 유배지에서 연산군(燕山君)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역질(疫疾)에 걸려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던 그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말은 단 한마디였습니다.


"신씨(申氏)를 보고 싶다."



수천 명의 기생을 곁에 두고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즐겼다는 희대의 색마(色魔).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부른 이름은 중전(中殿)이었습니다. 31세, 짧고 처절한 생애였습니다.


죽은 군주는 말이 없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붓을 쥐었습니다.


이후 500년 동안 연산군은 단 하나의 이미지로 박제되었습니다. 전국에서 1만 명의 기생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벌이고, 큰어머니를 강간하며, 비구니를 겁탈한 '희대의 색마'이자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폭군'. 조선 500년을 통틀어 이보다 선명한 악당의 초상은 없었습니다.


그 악당의 초상 뒤에는 다른 얼굴도 있었습니다. 130여 수의 시(詩)를 남긴 예술가,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던 아들, 강력한 왕권을 꿈꾸었으나 고립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한 청년 군주. 그 복잡한 인간이 어떻게 납작한 악당으로 짓눌렸는지, 지금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1장. 승자의 붓이 만들어낸 완벽한 '악당'의 조건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에게는 언제나 명분이 필요합니다.


1506년 9월,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을 필두로 한 훈구 세력은 현직 왕을 무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이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신하가 하늘이 내린 군주를 칼로 폐위하는 행위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가볍게 포장될 수 없는 '불충(不忠)'이자 '반역'이었습니다. 반정의 칼날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베어낸 왕이 인간 이하의 존재여야 했습니다.


왕이 정치를 못 했다는 정도로는 부족했습니다. 유교 도덕률을 짓밟은 짐승이어야 했고, 성적으로 타락한 괴물이어야 했으며, 종교의 신성함마저 능멸한 구제 불능의 광인이어야 했습니다.


실록청(實錄廳)을 장악한 사대부들은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입니다. 주목할 점은 이 기록의 편찬 주체입니다. 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바로 그 세력이 전임 왕의 역사를 썼습니다. 편찬 과정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참상을 목격한 사관들은 사초를 썼다가 훗날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기록 제출을 극도로 꺼렸고, 그나마 모인 사초도 두 명이 쓴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료의 공백을 메운 것은 반정 공신들의 진술이었습니다.


사관들의 조작 의도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피 묻은 적삼' 이야기입니다. 흔히 임사홍이 폐비 윤씨의 피 묻은 적삼을 연산군에게 바치며 진실을 폭로하자, 충격을 받은 왕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정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후대의 야사와 소설이 만들어낸 극적 장치였을 뿐입니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어머니에 관한 일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고, 갑자사화는 충동이 아니라 계획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신의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그에 부합하는 증거만 취사선택하는 사고의 오류입니다. 반정 세력에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짐승이어야 했습니다. 사관들의 붓은 그 결론을 향해 사실의 경계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알아온 연산군의 황음무도(荒淫無道)는 과연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숫자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2장. 숫자의 마술과 왜곡: 1만 명의 기생 '흥청(興淸)'의 진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이 '흥청악(興淸樂) 1만 명을 유지할 물건을 마련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 하나가 500년간 '1만 명의 기생을 거느린 황음무도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1개월 전, 장악원(掌樂院)의 실제 보고서에는 전혀 다른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정원 300명 중 겨우 93명만 채웠다는 기록이었습니다.


11개월 만에 93명이 1만 명이 되었습니다. 사관의 수치 조작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흥청(興淸)과 운평(運平)의 정체도 다시 봐야 합니다. 연산군이 궁으로 불러들인 이들은 국가 소속의 전문 음악인이자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들을 '바르지 못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는 뜻의 흥청(興淸),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의 운평(運平)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고위 관료조차 이들 앞에서 땅에 앉도록 할 만큼 예술가로서 각별히 예우했습니다.


물론 국가 재정을 동원해 예술인들에게 대궐 같은 집을 하사하고 연일 화려한 연회를 연 것 자체는 비판받아 마땅한 낭비였습니다. 다만 그 예술인이 93명이었다는 사실은, '1만 명'이라는 숫자와 그 숫자가 만들어낸 전설이 실체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까지 쓰이는 '흥청망청'이라는 표현도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흥청'이 먼저였고, 반정 이후 '그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뜻의 '망청(亡淸)'이 덧붙어 굳어진 말입니다.


한편 실록에는 궁궐 내에 '거사(擧舍)'라는 작은 방들을 수없이 만들어 즉흥적으로 향락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거사 설치와 1만 명의 기생 이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서술입니다. 사관들은 실제로 있었던 방종의 기록 위에 수십 배로 부풀린 숫자와 날조된 성범죄를 덧씌웠습니다.


사대부들이 흥청 문제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 흥청은 연산군의 성적 방종의 증거가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을 정면으로 건드린 존재였습니다.



3장. 사대부의 위선과 적반하장: 진짜 '색마(色魔)'는 누구였는가?


당시 관료들에게 궁중의 여성 음악인, 즉 여악(女樂)과 광희(廣戲)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의 첩으로 삼거나 성욕을 해소하는 통로로 여기던 계층이 바로 사대부 관료들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들이 사대부의 집으로 드나드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사노비(私奴婢)로 전환하여 관료들의 성적 일탈 경로를 원천 차단한 것입니다. 수십 년간 당연한 것으로 누려온 특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관료들의 분노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자명했습니다.


사태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연산군이 궁중 연회에서 여성 대신 남성 음악인(남악(男樂))만 쓰도록 하자, 정1품(正一品) 영사(領事)인 성준(成俊)이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며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이에 연산군은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조관(朝官)들이 기생을 욕심 없이 맑게 보지 않으니 섞이게 할 수 없다."


국가 최고 직위의 신하가 연회에 기생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항의했고, 왕은 오히려 신하들의 문란함을 질책했습니다. 훗날 연산군을 색마로 규정하고 실록을 편찬한 바로 그 사대부들의 민낯입니다.


겉으로는 공자맹자를 읊고, 뒤로는 기생을 탐하던 위선. 연산군은 그 위선의 뿌리를 건드렸고, 사대부들은 왕이 쓰러진 뒤 자신들의 오물을 고스란히 패주(廢主)에게 뒤집어씌웠습니다.



4장. 엽기적 성추문의 해부: 비구니 사건과 백모 강간설의 논리적 모순


『연산군일기』는 두 건의 엽기적 성범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업원(淨業院) 비구니 겁탈 사건과, 큰어머니인 월산대군(月山大君) 부인 박씨(朴氏) 강간설입니다. 이 두 사건은 연산군을 '유교의 도덕률을 넘어 종교적 신성함마저 짓밟은 짐승'으로 박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두 기록 모두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 정업원 비구니 사건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환관 5~6명에게 몽둥이를 쥐여주고 시끌벅적하게 정업원에 쳐들어가 늙은 비구니들을 내쫓고 젊은 비구니를 겁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연산군 본인의 행동 패턴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당시 연산군은 밖으로 새어 나가는 소문을 극도로 두려워하여 궁 밖의 평범한 기생조차 함부로 들이기를 꺼렸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백주대낮에 환관을 대동하고 몽둥이까지 휘두르며 요란하게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연산군을 종교적 신성함마저 능멸하는 광인으로 묘사하기 위해, 반정 세력의 사관들이 의도적으로 연출해 낸 장면일 확률이 높습니다.


▶ 박씨 부인 강간설과 의학적 모순

실록은 연산군이 박씨 부인을 겁탈하여 임신까지 시켰고,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박씨가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반정 1등 공신 박원종(朴元宗)이 쿠데타를 일으킨 개인적 명분이기도 했습니다. 박씨 부인이 박원종의 친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씨 부인이 사망한 1506년, 그녀의 나이는 53~55세였습니다. 영양 상태가 열악했던 16세기 조선에서 50대 중반 여성이 임신을 했다는 주장은 의학적·생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연산군은 박씨 부인이 죽기 불과 한 달 전에 수절을 지킨 여인이라며 절부(節婦)로 표창하고 가마를 하사했습니다. 사관은 이 표창 기사 바로 아래에 '드디어 간통을 했다'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공식 표창과 간통 기록이 나란히 공존하는 이 기묘한 구성. 그 사이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이 박씨 부인을 자주 궁으로 불렀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박씨 부인은 어머니를 일찍 잃은 연산군의 세자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왕실의 은인이었습니다. 연산군의 예우는 패륜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감사를 사관들은 근친상간으로 뒤틀었고, 박원종은 '누이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쿠데타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날조된 치정 스캔들이 반역의 명분이 된 사례입니다.



5장. 여성 편력의 팩트 체크: '성군' 성종(成宗) vs '색마' 연산군


어떤 남성의 여성 편력을 가늠하는 가장 직접적인 실증 지표 중 하나는 자녀의 수입니다.


사대부들이 '요순(堯舜)'에 비교하며 추앙한 성종(成宗)의 가계를 먼저 살펴봅니다.


성종은 재위 기간 동안 공혜왕후(恭惠王后), 폐비 윤씨(廢妃 尹氏), 정현왕후(貞顯王后) 등 3명의 왕비를 두었고, 공식 후궁만 9명에 달했습니다. 그 결과 16남 21녀, 총 37명의 자녀를 남겼습니다. 조선 역대 왕 중에서도 손꼽히는 여성 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력은 거대한 비극을 잉태했습니다. 수많은 후궁들이 왕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저주굿을 벌이고 궁중 암투를 일삼은 끝에, 사약(賜藥)을 받은 여인이 나왔습니다. 연산군의 친모 폐비 윤씨였습니다. 훗날의 피바람,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씨앗을 뿌린 것은 사대부들이 '성군'으로 떠받든 성종의 여성 편력이었습니다.


이제 '희대의 색마' 연산군의 가계를 봅니다.


연산군은 중전(中殿) 신씨(愼氏)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습니다. 장녹수(張綠水) 등 후궁에게서 얻은 서자녀는 4명. 전부 합쳐도 4남 3녀, 총 7명이었습니다.


1만 명의 여인과 매일 밤을 보낸 남자의 자녀가 7명, 9명의 후궁을 거느린 성군의 자녀가 37명.


숫자는 냉정합니다.


▶ 장녹수의 치명적 매력: '색(色)'이 아니라 '모성(母性)'이었다

사람들은 장녹수를 절세미녀이자 연산군을 타락으로 이끈 요부(妖婦)로 기억합니다. 실록이 전하는 그녀의 실제 모습은 다릅니다. 장녹수는 입궁 전 이미 두 번 혼인하고 아들까지 둔 유부녀였으며, 연산군보다 한참 연상인 30대 중반이었습니다. 실록조차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0대의 절대 군주는 왜 이 여인에게 그토록 집착했을까요.


실록은 힌트를 줍니다. "장녹수가 왕을 조롱하기도 하고 갓난아기 다루듯 어르기도 하였는데, 왕이 몹시 화가 났다가도 녹수만 보면 반드시 웃었다."


어머니를 일찍 잃고 사랑이 말라버린 궁궐에서 자라난 연산군에게 장녹수가 채워준 것은 육체적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혼내고, 때로는 달래주는 그 역할. 그것은 그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모성(母性)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소박한 여성 편력을 가진 군주가 왜 왕좌에서 끌려 내려와야 했을까요. 황음무도가 표면적 명분이었다면, 그 이면의 진짜 이유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6장. 연산군이 쫓겨난 '진짜' 이유: 고립된 권력과 정치적 패착


연산군의 정치적 실패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만 그 원인이 '황음무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짚어야 합니다. 반정 세력이 칼을 빼든 진짜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 첫째, 견제 시스템의 파괴와 공포 정치

갑자사화의 발단이 된 것은 놀랍도록 사소한 사건들이었습니다. 1503년,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가 연회 자리에서 임금이 내린 술을 마시다 곤룡포에 술을 조금 흘렸습니다. 연산군은 이를 '불경죄'로 엮어 이세좌를 파직하고 귀양 보냈다가 복직시켰습니다. 이듬해 봄,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洪貴達)이 후궁 간택령이 내려지자 손녀의 병을 핑계로 입궐을 늦추었습니다. 연산군은 "이세좌가 쉽게 용서받았기 때문에 홍귀달이 이토록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이세좌를 다시 유배 보내고 삼사 관리들을 전부 하옥시켰습니다.


술잔에 흘린 술 한 방울. 이것이 도화선이었습니다.


이어진 갑자사화는 철저히 계산된 정치 공학이었습니다. 연산군은 방탕한 유흥으로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 위해 훈구 권신들이 수십 년간 축적해 온 공신전(功臣田)과 노비를 합법적으로 몰수할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어머니의 원한'은 가장 완벽한 명분이었습니다.


1504년 3월 20일 한밤중,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엄귀인(嚴貴人)과 정귀인(鄭貴人)을 창경궁 뜰에 포박해 끌어왔습니다. 이 두 여인은 폐비 윤씨를 성종에게 참소하여 사사(賜死)하게 만든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들의 친아들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안양군(安陽君)과 봉안군(鳳安君)을 불러내어, 자루에 든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게 한 뒤 몽둥이질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봉안군은 자루 속이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몽둥이를 내리쳤고, 두 여인은 그렇게 맞아 죽었습니다. 연산군은 그 시신을 찢어 젓갈을 담근 뒤 산과 들에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자리를 나온 연산군은 칼을 들고 할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침소로 향했습니다. "어찌하여 제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큰 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불과 한 달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7개월에 걸친 숙청으로 239명이 넘는 관료와 사림이 화를 입었고, 절반 이상이 사형당했습니다.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정인지(鄭麟趾)·어세겸(魚世謙) 등은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의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습니다.


한편 연산군은 같은 해 어머니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묘를 능으로 격상시켰습니다. "하늘에 계신 원한을 씻어, 나의 애통하고 그립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을 펴게 되었노라."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1504년의 끝에, 왕은 어머니에게 그 이름을 돌려드렸습니다.


왕과 신하가 끊임없이 토론하고 견제하도록 설계된 나라에서, 연산군은 경연(經筵)을 폐지하고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언론 기능을 틀어막았습니다. 누구도 감히 왕에게 반대할 수 없는 공포 정치가 완성되었을 때, 왕을 지켜줄 충신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 둘째, 엘리트 관료 집단의 이반

1505년 4월, 바른말을 올리다 왕의 노여움을 산 내관(內官) 김처선(金處善)이 처형되었습니다. 연산군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처선의 가산을 적몰하고 그가 살던 집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습니다. 친족을 7촌까지 찾아내 연좌제로 처벌하고 부모의 무덤까지 파헤쳤습니다. 심지어 김처선의 본관인 전의(全義)를 혁파하여 지도에서 아예 지워버렸습니다. 충언을 올린 신하의 고향까지 없애버린 것입니다.


같은 해 5월에는 고문을 잘하는 사람 20명을 응방(鷹坊)에 소속시켜 궁 안에 상주시키며, 언제든 즉각 심문이 가능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1506년 3월에는 자신이 총애하는 흥청(興淸)이 부모를 뵈러 출궁할 때 승지(承旨)·선전관(宣傳官) 등 조정 핵심 관료들이 직접 호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천민 출신이 대다수인 기생의 행차를 조정 최고위 관리가 수행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자존심이 생명인 사대부들에게 이는 "너희는 내 기생보다 못한 노예다"라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왕을 끝까지 지켜줄 신하는 없었습니다.


▶ 셋째, 민생의 파탄

연산군은 궁중 예술인들의 치장을 위해 명나라 연경(燕京)에 사신이 갈 때마다 연지 1천 편, 분 1천 근을 사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취홍원(聚紅院)에는 무고(舞鼓) 다섯 개를 서둘러 들이라 명했고, 그해 11월에는 공작 깃 300개를 구해오라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막대한 예산 낭비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연산군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국가의 일이란 소민(小民)과는 규모가 같지 않아서 좀스럽게 할 수 없고 대체(大體)로써 행해야 하니, 감히 비방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재정을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선언이었습니다.


1505년 7월, 연산군은 동북으로 광주·양주·포천·영평에서 서남으로 파주·고양·양천·금천·과천·통진·김포에 이르는 광역의 땅에서 주민 500여 호를 모조리 내쫓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들을 채워 넣고 네 모퉁이에 금표(禁標)를 세웠습니다. 금표 안에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 즉 죽여서 길거리에 버리는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초부(樵夫)와 목동의 발길까지 완전히 끊긴 그 땅에서 살던 백성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7월, 연산군은 시 한 수를 지어 내렸습니다. "나비가 꽃 피기를 재촉하니 향기가 무르녹고 벌이 예쁨을 희롱하니 아리따움이 깔려 있네. 태평을 이미 얻은 순연한 지역이니 화창함에 길이 기대 현훈을 잔치하리." 백성들의 눈물 위에 세운 사냥터에서 '태평'을 노래했습니다.


그해 11월에도 강제 철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강(西江) 지역의 주민 100여 호를 추가로 내쫓고 광흥창(廣興倉)을 금표 밖으로 옮겼습니다. 한 해 동안 600여 호가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충신도, 관료도, 백성도 등을 돌렸습니다. 왕을 지켜줄 우군(友軍)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반정군의 칼이 들어왔을 때, 연산군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7장. 결론: 500년의 형벌, 붓을 쥔 자들의 잔혹한 보복


1506년 11월, 강화도 교동 유배지에서 연산군은 역질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31세였습니다. 묘호(廟號)도, 능호(陵號)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조정의 정승들이 모여 결정을 내렸습니다. "선왕의 사기(史記)는 『실록(實錄)』이라 일컬으나 연산군의 사기는 『실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록보다 격이 낮은 '일기(日記)'로 편찬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제학 김감(金勘)이 편찬을 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면서 작업이 중단되었고, 이후 성희안(成希顔)·신용개(申用漑) 등이 총재관을 맡아 66인의 편찬관을 동원해 편찬을 이어갔습니다. 1509년, 총 63권 43책으로 『연산군일기』가 완성되었습니다.


중종(中宗)은 즉위 후 "폐조(廢朝) 때의 갑자년과 무오년 무렵에 사림(士林)들이 죄도 없이 죽임받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며 진상 조사를 명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죽임을 당했거나 부관참시를 당했는지 의금부가 낱낱이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했고,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에게는 증직(贈職)을 내리고 연좌제로 벼슬길이 막혔던 그 자손들을 다시 임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연산군이 남긴 핏빛 상처를 수습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칼럼을 통해 연산군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소한 빌미 하나로 239명을 학살하는 사화를 일으켰고, 경연을 폐지하고 언론을 짓눌렀으며, 한 해에만 600여 호의 백성을 삶의 터전에서 내몰았습니다. 절대 권력의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괴한 실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이 평가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치적 실패자'인 것과 '1만 명의 여인을 탐하고 큰어머니를 강간한 변태 색마'인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실을 되짚어봅시다. 흥청의 실제 인원은 300명 정원에 93명이었으며, 이들은 국가 예술인이었습니다. 연산군의 자녀는 7명이었고, 9명의 후궁을 둔 성종의 자녀는 37명이었습니다. 피 묻은 적삼은 정사에 존재하지 않는 소설의 장면이었습니다.


비구니 겁탈 기록은 연산군 본인의 행동 패턴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박씨 부인의 잉태설은 당시 53~55세였던 그녀의 나이 앞에서 무너집니다. 박원종은 그 무너지는 이야기 위에 반역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집단의 죄와 오물을 한 인물에게 전가하여 공동체 내부의 죄의식을 봉합하는 구조입니다. 반정 세력은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불충(不忠)의 짐을 연산군에게 전가했고,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성적 일탈과 탐욕을 폐주의 이름 아래 묻었습니다.


그렇게 박제된 악당의 초상 속에서 지워진 것이 있습니다. 130여 수의 시를 남긴 예술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피를 토하던 아들. 붓으로 새긴 낙인은 그 모든 것을 덮어버렸고, 500년을 살아남았습니다.


연산군은 오늘날에도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수천 명의 기생과 술판을 벌이는 변태적 색마로 소비됩니다. 이것이 붓을 쥔 자들의 보복이었고, 그 보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록된 역사는 언제나 진실인가?"


이 질문은 조선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반대편을 악마화하는 방식은 500년 전과 판박이처럼 반복됩니다. 연산군의 조작된 민낯을 마주하는 것은, 누군가의 붓으로 덧칠된 프레임을 비판 없이 수용해 온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신씨를 보고 싶다"고 했던 그 사람. 낡은 역사의 안경을 벗어던질 때, 비로소 우리는 500년째 박제된 초상 뒤에 숨어 있던 인간의 맨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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