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흐르던 그 선율, 첫사랑의 기억
1995년 겨울, ELF에서 발매된 『동급생2』전작의 성공을 이어받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주인공이 되어 여름방학과 2학기 동안 학교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러 여성 캐릭터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게임이다. 실시간으로 흘러가는 시간 시스템, 각 캐릭터마다 정해진 일정과 장소, 복잡한 호감도 관리.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 발품을 팔아 인연을 만들어가야 하는, 그 시절로서는 혁신적인 시스템이었다.
그 시절 CRT 모니터 앞에서 nanpa.exe를 실행시킬 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도트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 비주얼, 복잡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게임 시스템.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니, 진짜 마음 깊이 새겨진 건 따로 있었는데 바로 각 캐릭터와 함께 흘러나오던 음악이다.
작곡가 쿠니에다 마나부(国枝 学)가 만들어낸 캐릭터 테마곡들은 배경음악 그 이상으로 그들의 성격과 감정을 대변한다. 그는 이후 『노노무라 병원 사람들』의 음악도 담당하며 ELF 사운드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PC-98의 YM2608 FM음원 칩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사운드는 그 시절만의 특별한 감성을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루사와 유이가 화면에 나타날 때 들려오던 그 선율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유이는 주인공 류노스케와 한 집에 사는 소녀다. 고고학자인 아버지의 사정으로 10년 전부터 나루사와 가에 신세를 지게 된 류노스케와 함께 자랐다.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집에서는 오빠라 부르는, 실제로는 동갑인 소녀. 학교에서는 류노스케의 부탁으로 "류노스케군"이라 부르지만, 그 어색한 호칭 속에서도 10년간 쌓아온 친밀함이 묻어난다. 명문학교에서 류노스케와 같은 학교로 전학까지 왔다.
송곳니가 살짝 보일 때마다 드러나는 천진함, 오래전부터 품어온 마음이 있지만 류노스케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 때문에 늘 한 발짝 뒤에 서 있다. 친남매처럼 자랐기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그 조심스러움이 사춘기 시절 우리가 품었던 그 떨림과 꼭 닮아있다.
게임 속에서 유이는 까다로운 캐릭터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를 하나라도 놓치면 만날 수 없고, 다른 캐릭터들보다 훨씬 많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어쩌면 그 어려움이 유이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모든 조건을 맞춰 드디어 유이를 만났을 때의 그 안도감과 기쁨이란.
그런데 게임 속 FM음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의 깊이가 있었다. 1995년 발매된 공식 사운드트랙 앨범에 수록된 「唯のテーマ」는 바로 그 아쉬움을 채워주는 선물이다. PC-98의 YM2608 칩으로 만들어졌던 원곡을 CD-DA 오디오 트랙으로 새롭게 편곡한 이 버전은, 실제 악기와 고품질 신시사이저를 사용해 원곡의 정수를 잃지 않으면서도 한층 깊은 감정선을 그려낸다.
신디사이저의 맑은 음색으로 시작되는 인트로는 유이의 천진한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FM음원 특유의 날카로운 사운드와는 다른 차원의 따뜻함이 우리를 감싸면서, 다시 그 시절 방 안으로 데려간다. 일렉기타는 류노스케의 흔들리는 내면을 그려낸다. 날카롭게 선을 긋다가도 어느 순간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그 소리. 각 악기가 미묘하게 엇갈리면서도 결국 하나의 선율로 어우러지는 모습은, 서로 다른 박동으로 뛰던 두 심장이 점차 하나의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이 게임의 음악이 특별한 건, 각 캐릭터마다 그들만의 테마곡이 있다는 점이다. 병원에 입원한 스기모토 사쿠라코의 테마는 그녀의 고독과 희망을 동시에 담아냈고, 아이돌 마이지마 카렌의 테마는 90년대 J-POP 스타일의 화려함으로 탄생한다. 궁도부 소속 시노하라 이즈미의 테마는 보이시한 그녀의 성격을 반영한 활기찬 리듬이 특징이다. 나루사와 미사코의 테마는 어른스러운 서정미를 담아 유이와는 또 다른 감성을 전달한다.
집 컴퓨터 앞에서 누군가 정성스럽게 써놓은 공략집을 옆에 두고, 시간표를 맞춰가며 유이를 만나려 애썼던 밤들. 아무리 공략집을 봐도 쉽지 않은 복잡한 호감도 시스템,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지켜야만 볼 수 있는 이벤트들.
그런 어려움마저 설레는 일이었다. 유이가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녀의 BGM이 흘러나오면 정말로 특별한 순간처럼 느껴진다. 실제 악기 연주가 주는 생생함은 유이를 게임 속 인물 그 이상으로, 정말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땐 몰랐다. 이 음악이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가슴을 울릴 거라는 걸.
지금 이 곡을 다시 들으면, 처음 미연시라는 장르를 만났던 그 순간이 되살아난다. 화면 속 캐릭터에게 진짜 마음을 빼앗겼던 그 시절의 기억들. FM음원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의 미묘한 떨림이 실제 연주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세월이 흘러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식되면서 음악도 진화했다. 세가 새턴 버전에는 성우 마츠시타 미유키가 부른 엔딩곡 "봄을 기다리는 계절"이 추가되었고, PC-FX 버전은 《그란디아》의 이와다레 노리유키 같은 유명 작곡가들이 참여해 완전히 새로운 편곡을 선보였다. 각 버전마다 다른 해석과 감성을 담았지만, 유이를 향한 그 설렘만은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건, 그 시절 우리가 품었던 순수한 설렘이 음악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