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회의에서 미국 동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나만 빼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나는 그 웃음 속에서 혼자 굳어 있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별 그리기를 못해 혼자 남겨지던 그 교실이 떠올랐다.
텍사스 오스틴으로 온 지 1년이 됐다. 나는 40대 엔지니어다. 그리고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이방인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타지 생활의 고충으로 외로움을 꼽는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흔히 말하는 그 외로움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아니, 없다는 건 틀린 표현인 것 같다. "적응되었다." 이게 맞는 말일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나 이곳에 왔을 때나, 나는 어디에서나 외로웠다. 처자식과 함께 왔지만, 이 외로움은 관계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박힌 훨씬 더 본질적인 감정이다. 대학 시절, 잠시나마 사람들 틈에서 온기를 나누며 그 이방인의 꼬리표를 뗐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낯선 땅의 웃음소리 앞에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내 안의 그늘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가려져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나의 어린 시절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단연 '외로움'이다.
우리 집엔 다정함이 부재했다.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기념일은 그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연속된 날들 중 하루'일뿐이었다. 국가에서 보낸 주민등록증 발급 통지서를 받고서야 '아,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하고 자각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누나들은 집 밖의 교우관계를 통해 그 결핍을 채웠던 것 같지만, 나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나는 보통 아이들보다 예민했고 성격도 급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라 관심을 끌려던 서툰 장난은 늘 더 큰 소외감으로 돌아왔다. 결국 중학생 무렵부터는 관계 자체를 반쯤 포기했다. 나에게 관심을 주는 아이에게만 적당히 응대하는 수동적인 인간관계를 지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변화의 이면에는 '더 이상 가족들과 대화하지 않겠다'라고 스스로 다짐했던 모종의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소통의 시작인 가정에서부터 입을 닫아버린 것이 나를 더욱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었던 것 같다.
삼성에 다닐 적,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가 어릴 땐 부모 중 한 명은 집에 있어야 해. 안 그러면 결핍이 생기거든." 당시 나는 "저도 그렇게 컸지만 회사 잘 다니고 있지 않냐"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결핍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이 결핍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온 게 아닐까. 그 선배는 내게서 이미 그늘을 읽어냈기에 그런 말을 건넸던 것 아닐까.
부모님은 내가 여섯 살 때부터 함께 장사를 시작하셨다. 다섯 살에 혼자 한글을 떼고 동화책을 읽는 나를 보며, 부모님은 내심 '영재'라 믿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1년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해도 괜찮으리라 낙관하셨을 테다.
그러나 나에게 어린이집은 배움터가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였다.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기분 속에서, 비위가 약했던 나는 지저분한 화장실을 마주할 때마다 구역질을 참아야 했고, 인근 하천에서 풍겨오는 오수의 악취에 공포를 느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건 '별 그리기'였다. 남들처럼 매끈하고 대칭이 완벽한 별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모두가 하원한 뒤 홀로 남아 보충학습을 해야 했던 수치심. 세상이 나에게 "넌 모자란 아이야"라고 낙인찍는 듯했던 그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선명하다.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다투는 날들이 참 많았다. 다섯 살 무렵이었다. 회사에서 퇴근한 아버지는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엄마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나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교회 갔어."
그러자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교회를 쳐들어가셨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기도하던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집으로 질질 끌고 오셨다. 나는 어려서 왜 그랬는지 몰랐지만, 이후에 알게 된 내용은 엄마는 평소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이단으로 여겨지는 기독교 중 한 무리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독교라는 것 자체를 아주 싫어하셨다.
이런 내막은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은 하나였다. 내가 얘기해서 엄마가 저렇게 됐어. 내 탓이야. 그날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죄책감의 맛이었다. 달콤한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원 버스 안에서 부모님이 서로 큰소리로 싸우다가 홧김에 먼저 내려버리시고, 뒤늦게 나 혼자 허둥지둥 뒤따라 내렸을 때 느꼈던 그 적막감과 당혹감. 나는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언제나 '두려움'을 가슴 한편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1990년대 초반, 초등학교 1학년 때 SPC-1500이라는 기계가 찾아왔다. 내가 처음 본 PC의 모습이었다. 바야흐로 정보화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 때마침 교육용 PC가 처음 소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시골 출신에 학력도 높지 않았던 부모님은, 자식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는 판매원의 꾐에 넘어가 그 알 수 없는 비싼 물건을 덜컥 들여오셨다.
하지만 아무도 사용할 줄 모르는 그 기계는 거실의 장식품이 되었다. 그 침묵을 깬 건 나였다. 매뉴얼 뒤쪽을 보니 '두더지 잡기' 게임의 소스 코드가 수록되어 있었다. 누나가 학교에서 'BASIC'이라는 걸 배운다는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들었고, 그러한 누나의 얘기로는 이 코드를 그대로 타이핑하면 게임이 된다고 했다.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비장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A, B, C...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1학년 꼬마가 외계어 같은 영문 코드를 그림 그리듯 한 글자씩 옮겨 적었다. 손가락 끝이 저려올 만큼 긴 노동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줄을 입력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실행 키를 눌렀다.
결과는 참담했다. 화면 가득 뜬 에러 메시지. 영어 단어를 모르니 어디서 오타가 났는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디버깅'이라는 개념조차 모르던 시절, 나의 첫 코딩은 그렇게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결국 그 최첨단 기계는 누구의 손길도 타지 못한 채,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는 커다란 흉물로 전락해 버렸다.
하지만 그 실패가 끝은 아니었다. 비록 게임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SPC-1500은 내게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아주 살짝 열어 보여주었다.
그건 텔레비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텔레비전은 내가 울든 웃든 상관없이 혼자 떠드는 상자였다. 부모님의 싸움처럼. 컴퓨터는 달랐다. 내가 키보드를 누르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나의 입력만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존재.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입력하면, 서툴더라도 반드시 반응을 보여주는 정직한 세계.
비록 영어 스펠링을 몰라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어린 나는 직감했다.
그 막연한 기대감. 세상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저 안에 있을지 모른다는 예감.
그 막연한 기대감이 구체적인 즐거움으로 바뀐 건,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우리 집에 두 번째 기계, '286 XT'가 들어온 것이다.
서울 사는 고종사촌 집과 우리 집에 한 대씩 배달된 이 물건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았다. 얼핏 듣기로는 지인이 운영하던 컴퓨터 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거기서 쓰던 대만제 조립 PC를 헐값에 얻어왔다고 했다. 누군가의 폐업이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개업이 된 셈이다.
이 물건은 사용하기 어렵던 SPC-1500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학교에도 이미 컴퓨터실이 생기기 시작했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화폐처럼 돌았다. MS-DOS라는 낯선 운영체제 위에서, 복제된 게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이 기계는 게임기였다. 그때부터 컴퓨터는 내게 '미지의 상자'가 아니라, 확실한 즐거움을 주는 '최고의 장난감'이 되었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원리를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그저 눈앞의 화면이 주는 쾌락이면 충분했다.
현실의 나는 무력했다. 부모님의 싸움을 말릴 힘도, 학교에서 인정받을 재주도 없었다. 공부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을 견뎌야만 겨우 칭찬 한 조각이 떨어질까 말까 한, 가성비 떨어지는 노동이었다. 성격 급한 내게 그 긴 기다림은 고문과도 같았다.
하지만 게임은 달랐다.
방향키를 누르면 캐릭터는 즉시 움직였고, 버튼을 누르면 적이 쓰러졌다. 노력과 결과 사이의 시차가 없었다. 내가 입력하는 대로 세상이 바뀌고, 미션을 완수하면 즉각적인 축팡파르가 울렸다. 그 작은 모니터 속에서만큼은 내가 주인공이었고, 내가 규칙을 통제할 수 있었다. 현실의 불안과 외로움을 잊기에, 그 즉각적인 성취감만큼 달콤한 마약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통제 가능한 세계'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나의 게임 인생은 5학년 때 '그린컴퓨터 3'을 만나며 중흥기를 맞이했다. 윈도 3.1, VGA의 화려한 색감, MIDI 사운드, 그리고 CD-ROM이라는 광학 미디어. 바야흐로 '멀티미디어'의 시대였다.
이제 컴퓨터는 단순한 계산기나 게임기를 넘어,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친숙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그저 주어진 게임을 소비하는, 화면 밖의 관객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여느 때처럼 전원을 켰는데, 익숙한 부팅 화면 대신 먹통이 된 모니터만이 나를 반겼다. 리부팅 버튼을 수차례 눌러봤지만 소용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다 고장 났구나. 내 게임들, 내 세이브 파일들 다 날아갔겠구나.'
속상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부모님은 삼성전자 AS 기사를 불렀다.
말끔한 유니폼을 입고 방문한 기사님은 내 PC 앞에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보았다.
CMOS Setup.
기사님이 특정 키를 누르자, 늘 보던 DOS 화면이 아닌 마치 Norton utility와 비슷하지만 사뭇 다른 파란 설정 화면이 나타났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훔쳐보았다. 신선했다.
'저런 화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저 안에 숨겨진 기능이 있었구나. 저기에 들어가야 고칠 수 있는 거였어.'
그날의 경험은 내 시야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컴퓨터는 단순히 겉만 번지르르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시스템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진짜 세계'가 숨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단순한 게이머가 아니었다. 게임을 더 원활하게 돌리기 위해 메모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백신 프로그램 어떤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파고들었다.
나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친구들이었다. 컴퓨터가 고장 나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가 있으면, 나는 주저 없이 달려가 그 '비밀의 지식'을 발휘했다. 친구들의 고마워하던 그 한마디. 그 인정이 나를 춤추게 했다. 집에서는 늘 주눅 들어 있었지만, 친구들의 고장 난 PC 앞에 앉은 순간만큼은 내가 대장이었다. '얘네들에겐 내가 필요한 존재구나.' 그 효능감은 그 무엇보다 짜릿했다.
물론 어머니는 질색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에게는 기술 좋기로 소문난 오빠(나의 외삼촌)가 있었다. 기계라면 못 고치는 게 없던 '능력자'였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건달처럼 살았던 오빠. 어머니는 아들이 그 모습을 닮아갈까 봐 두려우셨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꾸지람도 나를 멈출 순 없었다.
외로웠던 소년에게는, 미래의 안정보다 지금 당장 내 손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의 눈빛이 훨씬 더 소중했으니까.
PC 수리를 넘어, 나는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6학년 당시 서점의 컴퓨터 서적 코너는 나의 새로운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나는 'PC Tools'와 같은 만능 도구들을 알게 되었고, '16진수'라는 기계들의 은밀한 언어를 배웠다.
초등학생이 이해하기엔 난해한 숫자와 문자의 배열이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암호를 해독하면 게임 속 세상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나는 '16진수 에디터'라는 수술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게임 망국전기의 데이터 파일을 열어 숫자를 조작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캐릭터의 돈이 무한대로 늘어나고, 능력치가 최고치로 치솟았다. 개발자가 정해놓은 규칙을 내가 깨트린 것이다.
나는 영어 학원 선생님을 찾아갔다. 평소 내게 최신 게임 디스켓을 몰래 챙겨주시던, 나에게는 산타클로스 같던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스스로 게임 치트를 해냈다는 것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그러나 나의 설명에 선생님의 눈빛이 의심에서 놀라움으로, 그리고 마침내 인정으로 바뀌는 그 짧은 순간.
그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차올랐다. 어른들도 잘 모르는 걸 내가 해냈어. 별 그리기를 못해 혼자 남겨지던 아이가, 지금 어른이 모르는 걸 해낸 것이다.
그날 밤, 나의 장래 희망란은 바뀌었다.
어릴 적 막연하게 꿈꾸던 '발명가'라는 단어는 지워졌다. 대신 그 자리에 '컴퓨터 전문가'라는, 당시로서는 낯설지만 나에게만은 너무나 선명한 목표가 새겨졌다.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야 할 유일한 세계였다.
하지만 세상은 내 모니터 속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중학교 교문은 이미 저만치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엔 내가 한 번도 준비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싸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