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속의 투명인간, 그리고 오해받은 열정

by BGN

그렇게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서울의 M중학교. 남학생들만 모인 그곳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입학의 설렘이 머물 자리는 없었다. 대신 거칠고 살벌한 공기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툭하면 주먹다짐을 벌이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통제한다는 명목하에 각목이나 고무 막대기 등 저마다의 '훈육 도구'를 지팡이처럼 짚고 다니던 선생님들.

내가 졸업하고 십여 년 뒤, 한 체육 교사의 가혹한 얼차려로 학생이 사망하는 비극이 터지기 전까지—그 야만의 시간은 그곳의 당연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침묵을 선택했고, 학교에서는 야만을 목격했다. 다행히 중학교에 올라오며 키가 훌쩍 커버린 덕에, 맨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거친 무리에 섞일 용기도, 맞서 싸울 배짱도 없었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학교 밖의 세상도 심상치 않았다. 1995년에서 1997년 사이, 대한민국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덮치기 전, 어른들의 세계에는 이미 불길한 징조가 감돌았다.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의 신경은 날마다 날카로워져 갔고, 집안의 공기는 살얼음판 같았다. 부부싸움은 더 잦아졌고, 그 불안의 화살은 종종 가장 만만한 나에게로 향했다.


현실에서 도망칠 곳은 여전히 컴퓨터뿐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의 당당했던 포부는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혼자서 무언가를 해보려 해도 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소프트웨어로 만든 거래. 그럼 소프트웨어는 뭘로 만들지?'

'프로그래밍 언어로... 만드는구나.'

'그럼 그 언어는 또 어떤 소프트웨어로 만들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그 끝에는 결국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에게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너 끈기 없어서 못 다녀. 수학 학원도 다니다 그만뒀잖아."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나는 재미없는 학원을 오래 다니지 못했으니까. '컴퓨터는 다르다'라고, '이건 진짜 내 길이다'라고 왜 더 강하게 주장하지 못했을까. 그 말을 삼킨 채, 나는 혼자 길을 찾기로 했다.

image.png 몇 시간이고 책을 골랐던 동네 서점.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 C언어 책.

포기하지 않고 혼자 길을 찾은 건 중2 무렵이었다. 서점에서 '터보 C(Turbo C) 입문' 책을 발견하고, MS-DOS의 실행 파일(. EXE)이 바로 C언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와레즈(Warez)를 통해 구한 터보 C 컴파일러로 나는 혼자 끙끙대며 코드를 짰다.


하지만 독학의 길은 험난했다. 특히 '포인터(Pointer)'라는 녀석이 나를 괴롭혔다. '그냥 변수를 쓰면 되는데, 왜 굳이 변수의 주소를 가리키는 변수를 또 만들어야 하지?' 흔히 교과서의 역할을 하는 책들은 '이런 게 있다'고만할 뿐, '왜 필요한지'는 알려주지 않는 것은 왜일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답답함에 책을 덮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까만 화면 속의 내 노력을 '오락'이라 불렀다. 하지만 터보 C가 뱉어내는 'Syntax Error'는 차라리 다정했다. 틀린 지점을 정확히 짚어줄 뿐, 나를 정죄하지는 않았으니까.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모두가 잠든 깊은 밤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들킬까 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내 옆에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야, 우리 아빠는 내가 코딩하는 것도 모른다? 진짜 억울해."


이렇게 툭 털어놓고 낄낄거릴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그 시절의 기억이 조금은 덜 시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게는 그런 친구가 없었다. 딱히 슬프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거였다. 원래 없었으니까.

그래도 밤새 코드를 짜다 마침내 정답이 튀어나올 때의 짜릿함만은, 방문 밖 부모님의 고성을 잠시 잊게 했다.


그리고 그 고립이 익숙해질 무렵, 세상이 먼저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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