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나를 찾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1997년 가을이었다.
교복은 바뀌었지만 세상은 그대로였다. 재단이 같았던 학교는 여전히 거칠고 삭막했고, 나는 여전히 그 안에서 투명인간이었다. 그런데 그해 가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처음 들어본 단어가 대한민국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IMF 외환위기.
막내 고모부의 비관 자살. 해고 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연이은 실패 끝에 생을 놓아버린 것이다.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멈췄다. 놀랐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당시 사촌 동생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나는 그 어린아이의 앞날보다 이상하게도 다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구나.' 죽음이 뉴스 속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부모님의 가게 매상은 곤두박질쳤고, 결국 할아버지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빌려도 소용없었다. 부모님의 다툼은 이제 일상이 아닌 생존의 비명이 되었다.
그 우울한 시대의 터널을 지나던 나에게, 유일한 빛은 전화선 너머에서 찾아왔다. 누나의 요청으로 56 kbps 모뎀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남들은 천리안이니 나우누리니 하는 유료 통신망을 썼지만, 나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전화 요금 고지서는 부모님의 화약고였으니까. 나는 '01414' 같은 무료 접속 번호를 찾아 조심스럽게 세상과 연결했다.
그 좁은 통로를 통해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문(Windows) 안에 갇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전문가들은 유닉스(Unix)라는 거대한 운영체제를 쓴다는 것, 그리고 리누스 토발즈라는 사람이 만든 그 유닉스의 클론, '리눅스(Linux)'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무료'라는 단어였다.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리눅스 책을 샀고, 부록으로 딸려 온 슬랙웨어(Slackware) CD를 떨리는 손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슬랙웨어는 불친절했다. Turbo C 입문 책의 포인터 파트를 읽었을 때 보다도. 마치 우주를 이해해야 될 것 같은 막막함이었다. 하드웨어 호환성 문제로 설치는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의 'LFS(Linux From Scratch)' 문서라도 있었다면 달랐을까. 결국 나는 레드햇(Red Hat)을 통해 겨우 그 미지의 땅에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리눅스가 보여준 세상은 경이로웠다. 검은 바탕의 텍스트 화면(Console)에서 멀티태스킹이 되다니! 도스(DOS) 시절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상 콘솔을 띄워 한쪽에선 '미드나잇 커맨더(Midnight Commander)'를 돌리고, 다른 쪽에선 X-Window를 실행하는 순간, 나는 마치 슈퍼컴퓨터를 조종하는 해커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GCC가 있었다. 가난한 학생인 나는 언제나 용산 전자상가의 불법 복제 CD나 와레즈를 뒤져야만 필요한 도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리눅스는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C 컴파일러를 공짜로 내어주었다. 리처드 스톨만, GNU 프로젝트... 그들의 선언문을 읽으며 나는 멈췄다.
'우리는 너처럼 컴퓨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걸 만들었어. 돈은 필요 없어. 그냥 너도 마음껏 쓰고, 나중에 실력이 되면 남들에게 베풀어.'
얼굴도 모르는 이국의 개발자들이었다. 사람의 언어는 여전히 나를 가두고 정죄했지만, 이 소스 코드의 언어는 달랐다.
"괜찮아, 너 혼자가 아니야. 너 잘하고 있어."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격려를 나는 차가운 모니터 속 텍스트에서 느꼈다. 그것은 내가 PC 앞에서 홀로 견뎌온 외로움에 처음으로 답장이 온 것 같았다. 나는 그 벅찬 감정으로 밤새 사운드카드를 잡기 위해 삽질을 하고, X-window를 띄우며 희열을 느꼈다. 나는 수많은 선배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유산 위에 서 있었다.
사람의 생은 이토록 허무하게 꺼지는데, 네트워크 너머 이름 모를 이들이 쌓아 올린 이 코드의 성벽은 무너지지 않고 견고했다. 나는 죽음이 지배하는 현실을 피해, 영원히 늙지 않는 논리의 성으로 망명을 떠났다.
하지만 고3이 되면서 그 열정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ADSL이 깔리고 스타크래프트가 세상을 휩쓸었지만, 내게 닥친 현실은 '수능'이라는 또 다른 벽이었다. 대학이 내 인생의 향방을 가를 거라는 건 알았지만, 억지로 하는 공부가 죽기보다 싫었다.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부모님과의 골은 깊어만 갔고, 나의 10대는 그렇게 불안한 미래를 안고 저물어가고 있었다.
컴퓨터 앞에서만큼은 분명했던 내가, 시험지 앞에서는 한없이 흐릿해졌다. 대학을 못 가면 인생이 끝나는 걸까. 컴퓨터 전문가라는 게 진짜 길이 될 수 있을까. 답은 없었다. 그냥 밤이 깊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