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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Aug 23. 2023

하재영 에세이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북리뷰

샛별BOOK연구소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로 유명한 하재영 작가의 새로운 책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봤다. 에세이마다 제목을 잘 짓는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자신을 거쳐온 집들을 말했다면 이번 책은  엄마에 대해 조심스럽게 썼다. 이 책을 통해 작가의 깊은 내면을 엿봤다고 할까. 두 권을 묶어 읽어도 좋겠다. 책 제목부터 '아니 어머니가 없었다니' 갸우뚱했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문장을 인용한 제목이다. 완독하면 제목이 이해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성에 대한 반기랄까. 고정관념에 박힌 어머니의 상.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딸의 분투적 욕망이 투영된 제목이다. 


  책은 어머니와 딸이 나눈 회고가 담겼다. 한 챕터 안에 어머님의 증언과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들어있다. 딸은 어머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착각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코 어머니를 모른다. 돈독한 모녀였어도 어쩜 서로를 모른 채 이별한다. 어머님과 조금이라도 얘기를 나눠보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 '어머니의 삶이 그랬어?'라며 생경할 테니까. 어머니를 모르면서 얼마나 그녀들의 삶을 단정 지었던가. 책은 어머니와 딸이 서로를 의식하며 증언했고, 기록했다. 한 여성으로 어머니로 딸로 지낸 생에 대한 각자의 솔직한 고백을 교감했다.  



   이 작업을 통해 딸은 어머니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어머님은 자신을 삶을 회고하며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화자는 여러 인용을 첨언하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을 넘어 독립된 주체로 살아가는 이 땅의 모성에 대해 언급한다. 가족 안에서 '어머니'는 어떤 존재일까. 다시 생각하고 재정립하게 해줄 책이다. 책을 읽고 나면 어머니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져볼 용기를 주기도 한다.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는 나의 그리운 어머니에게도 어떤 질문을 해볼까 휘청거리게 만든다.  





발췌



-글쓰기의 본질은 불가능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라 ‘시도’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것,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은 글을 쓰면서 품게 된 꿈이다. 거시적으로는 사회가 보거나 듣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의미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보다 미시적으로, 지극히 ‘사적’으로 나와 가장 가깝고 내가 거의 모르는 한 여성의 목소리를 기록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머니에 관한 책은 차고 넘치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말처럼 ‘한 인간의 존재 속에서 엄마란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결단코 가장 이상하고 예측이 불가하며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머니는 영원히 불가사의한 문학적 주제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쓴 유명한 문장이다.  -서문 중에서-

 

 

첫 번째 앨범 ‘평범한 여자 아이 되기’ 

 

-나는 열정이 없었나 봐. 젊은 날에 꿈이 없었어. 1970년대니까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정치도 몰랐고 데모로 휴강하면 그런가 보다 했어. 그저 책 읽고 영화 보고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게 다였지. 하다못해 연애라도 해볼걸, 그것도 안 했어. 미팅도 몇 번 나갔는데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더라고. 결핍도 욕망도 없었어. 우리 세대 여자 중에는 나 같은 사람이 좀 있지 않을까? 나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에도 대단한 여자가 있긴 했겠지. 자수성가해서 집안을 일으킨 여자도 있었을 테고, 뛰어나게 명석해서 유리천장을 깨는 여자도 있었을 테고, 사회를 바꾸고 싶어서 시위에 뛰어드는 여자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나도, 내 주변 여자들도 졸업하면 결혼하는 걸 수순으로 여겼어. 취직하더라도 결혼 전에 잠시 거치는 과정쯤으로 생각했고. 가끔 그런 친구들도 있었어. 의사든 변호사든 사(士)자 직업 가진 남자만 만나겠다는 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가서 호의호식하고 ‘사모님’ 소리 듣겠다는 친구들. 반면 결혼하고도 자기 일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친구들도 있었어.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대부분 그만두더라. 나는 남자 덕을 보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내 일을 가지려는 시도도 안 했으니 그 친구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몰라. 정말 아무 의식이 없었어.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 참 수동적으로 살았구나, 열정도 야망도 없었구나, 살림하고 시부모 모시고 남편 내조하고 아이 키우는 게 전부인 줄 알았구나. 다르게 사는 여자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어. 


-내가 봤던 여자 어른은 대부분 누구의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엄마였으니까. 나도 그게 여자의 역할이다 의무인 줄 알았지. 그렇게 살다 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네.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를 꼽으라면 그때인 것 같아. 학생이었던 시절. 누구의 아내고 며느리고 엄마도 아니었던 시절, 내가 그저 나였던 시절. (p.31)

 

-모두가 같거나 비슷해지기를 원하는 사회에서 낯선 존재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에 대해. 이제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잘’ 해 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평범함이 곧 행복함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결국 아무도. 아무것도 나를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p.43)

 

-말했잖아. 영화를 좋아했다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이 좋았다고. 다시 살아볼 수 있다면 배우가 되고 싶어. 나는 상인이었다가 농부였다가 군인이었다가 정치인이었다가 예술가일 거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아니라, 모두이면서 누구도 아닌 사람이 되겠지. (p.66)

 

-목소리를 제거(당)함. 이것은 가부장제가 초래하는 부정적 측면 가운데 하나다. 목소리를 빼앗음으로써 세상이나 타인과 충돌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충돌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들어온 대로 말하지 않기, 다수의 사람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않기, 내재된 가부장제의 언어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기. 이것은 목소리들의 싸움이다.(p.82)

 

 

세 번째 앨범: ‘여자가 여자를 키우는 데에는 모순이 있다.’

 

-나는 너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했어. 내가 엄격한 사람이기도 하고, 네가 맏이인데다 재능이 많아 보이니까 기대가 컸어. 내 기준치에 못 미치면 혼내고 내 기준치에 미쳐도 칭찬하는 데 인색했어. 칭찬하면 교만해질까 봐. 오만을 경계하고 겸손을 가르친다는 게 지나쳐버렸어. 그런 일이 쌓여서 네 자신감을 갉아먹었겠지. 네가 자신만만하고 고집스러운 게 걱정할 일도 아니었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는 장점일 수도 있는데, 내 사고방식이 그랬어. 여자아이가 나대면 사람들이 싫어할 거라는 생각. ‘겸손해라’, ‘양보해라’, ‘배려해라’, ‘지는 게 이기는 거다’. ‘폐 끼치지 마라’,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지 마라’, 늘 그렇게 가르쳤어. 언제부터인지 네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성격으로 바뀌더라. 사람들 눈치도 많이 보고. 

 

-요즘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아 프로그램을 자주 봐. 반성하고 또 반성해. 너무 무지했구나. 너희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노인이 되었어. 이제 나는 너희를 키우지 않지. 그래도 육아 프로그램은 자주 보고 있어. 지금이라도 알아야지.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다시 너를 키운다면 네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칭찬해주고 안아줄 텐데. 잘하고 있다고 자신감 북돋워줄 텐데..... 산다는 건, 세상과 부딪치는 건 자신감이 점점 꺾이는 일인데...... 네가 피기도 전에 내가 꺾어버린 것 같아.(p.96)


-내가 엄마에게 원망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엄마를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도 엄마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세상이 나를 버려도 엄마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p.124)

 

- 사실은 나도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왜 말더듬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느냐고, 열등감에 빠져 있을 때 지금 네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엄마는 고개를 숙일 것이다. 사과할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 앞에서 그토록 쉽게 죄인이 된다. 한때는 나도 말더듬증을 흉내 내며 조롱하는 아이들보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발레 선생보다 엄마를 더 원망했다. 내가 엄마에게 원망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엄마를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나도 엄마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세상이 나를 버려도 엄마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엄마에게 증오를 표출하고 책임을 전가하느라 나와 엄마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그 세계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과 차별에 대해 질문하지 못했다. 소녀에게 예쁘고 날씬하라고 강요하고 문화의 병폐를 지적하는 대신, 같은 사회에서 같은 인식을 주입받은 또 한 명의 여성으로서 다이어트를 권하는 어머니를 비난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우리는 세계의 실패를 직시하는 대신 그 실패를 어머니라는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써 근본적 원인을 은폐한다.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모든 사람처럼, 한때는 미숙했고,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p.125)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어머니다움’에 대한 정의는 일종의 신성이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처럼 이상적 어머니상은 신에 필적하기에 모든 어머니는 실패한다. 반드시 실패한다. 어머니가 ‘실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어머니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할 것이다. (p.127)

 

-엄마가 나에게 요구한 것과 더불어 내가 엄마에게 요구한 것을 돌아본다. 나는 엄마가 ‘언제나’ 나를 사랑하기를 원했다. ‘무조건’ 지지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도 엄마를 ‘언제나’ 사랑하지는 않았다. ‘무조건’ 지지하지도 않았다. 누구도 타인을 ‘언제나’ 사랑하거나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p.128)

 

-내가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를 처음으로 톺아본 것은 전작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을 집필하던 때였다. (p.205)


-엄마의 공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묘사할 수 없다. 그런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나마 여유로웠던 시절, 우리는 계단으로 층이 분리되고 가족 구성원의 숫자보다 방의 개수가 더 많은 집에 살았지만, 그때도 엄마는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했다. 나는 결혼한 뒤에야 이 문제를 인식하고 엄마가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아, 집 전체가 다 내 방이지.”(p.207)


-장소 상실은 한 사람의 자리를 지워버림으로써 또는 모든 자리에 그 사람이 머물게 함으로써 누군가를 ‘있지만 없는 사람’, ‘부재하는 존재’로 만든다. (p.207)

 

-“힘든 순간을 어떻게 극복했어?”라는 질문에 “살아가는 거야, 극복하는 게 아니야.”라고 대답하는 엄마에게서 상처를 극복하지 않고 살아갈 가능성을 발견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극복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자, 상처에 의해,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p.213)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엄마처럼 살기를 소망한다. 전자의 다짐은 엄마가 처했던 현실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고, 후자의 소망은 그 현실에서 고유성을 지키려 애썼던 엄마의 정신을 상속하겠다는 의미다.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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