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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Jan 12. 2023

[낭독&필사클럽] <묘사하는 마음> 후기

샛별BOOK연구소

[낭독& 필사클럽] 5기는 <묘사하는 마음>이었다. 함께 필사하고 낭독한 시간들을 정리해 본다. 27년 기자 생활을 한 김혜리 평론가. 평생 영화를 본 사람이 쓴 영화비평의 세계는 모호했다. 내공이 내포된 문장은 한 번 읽어서는 그 깊이에 안기기가 어려웠다. 기자는 감독,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작품들을 비교해 차이와 특색을 캐치해 언급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한 예술가의 '비평'은 아름다웠다.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화를 보고 읽는 것이다.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평을 읽고 영화를 보고 다시 평을 읽는 순서가 좋겠다. 목차는 1부 '부치지 못한 헌사에는 '이자벨 위페르'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크루즈' '폴 러드' '탈다 스윈튼' 배우들의 이야기와 2부 '각성하는 영화'로 문라이트, 레이디 버드, 미성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 3부 '욕망하는 영화' 4부 '근심하는 영화'  5부 '액션과 운동'  6부 '시간의 조형' 7부 '팽창하는 유니버스'이다. 

매주 수요일 밤마다 함께 모여 4-5챕터를 완독했고, 소개된 영화를 ZOOM으로 예고편을 봤다. 다른 에세이 낭독클럽보다 참여율이 저조했다. 12월은 연말이었고, 영화비평이라는 특수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묘사하는 마음>의 문장을 낭독하는 밤은 행복했다. 김혜리 기자가 선택한 영화목록도 흥미로웠고, 영화장면을 묘사하는 문장도 독특했다. 책 안에 흥분을 금치 못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모든 시네필들은 소름 돋을 정도로 공감 문장이 아닐지. 

"통로 쪽 좌석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  2022년 여름. 김혜리.

나는 <양들의 침묵>(1991), <연인>(1992)을 혼자 보기 시작했다. 저 문장처럼 저렇게. 통로 쪽 좌석에 홀로 앉아. 지금도 계속. 


발췌


▮‘사랑이라는 협상’ <내 사랑> 


모드가 집에 온 첫날 무슨 일부터 할까 묻자 에버렛은 “일일이 지시할 거면 내가 하고 말지!”라고 성을 내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감정 표현은 고사하고 아주 단순한 사실의 설명도 힘겨워하는 중증의 소통 장애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내 사랑>은 사회적 약자의 인물이 배려하는 반려자를 만나 잠재력을 실현한다는 인간 승리 미담이라기보다, 원래 강인한 여성이 본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도중에 겉으로만 터프해 보였던 미성숙한 남자까지 돕는 이야기라서 진부하지 않다. 에버렛은 그의 오두막이 그러하듯 모드에게 허름하지만 꼭 필요한 지붕이고, 모드는 그 지붕 밑을 진정한 집home으로 변화시킨다. (p.120)

▮‘닮은 영혼에 바치다’ <조용한 열정>


테런스 데이비스 감독이 최초로 실존 인물을 다룬 <조용한 열정>은 완벽한 대칭구도의 숏으로 시작한다. 당시 미국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던 홀리오크 학교의 교장 메리 라이언이 기독교 신앙을 영접한 학생과 앞으로 받아들이고 희망하는 학생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놓는다. 모두가 양쪽으로 비껴난 공간 중앙에 홀로 남은 에밀리(에마 벨)는 지극히 고독해 보이지만 이 이미지에는 유일무이한 영혼의 위풍당당함도 있다. 그는 180도 맞은편의 중앙에 서 있는 교장에게, 자신의 지성과 감정에 문제를 회부한 결과 개심할 수 없노라 말한다. (p.144)

▮ ‘이별의 기술’ <결혼 이야기>


물리적 폭력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의 ‘액션’시퀀스에 해당하는 클라이맥스는, 찰리가 LA에 얻은 아파트에 찾아온 나를 이 찰리와 대화를 시도하다가 서로를 상처 내는 언쟁으로 비화되는 10여 분의 시퀀스다. 거구의 찰리와 자그마한 니콜은 현저한 체격 차를 보이는 커플이다. 자칫하면 육체적 위협이 감정선을 압도할 수도 있다. 노아 바움백 감독은 니콜이 저돌적으로 쫓아다니고 찰리는 집 안 곳곳으로 피하도록 동선을 정해 니콜을 공격자 입장에 두는 한편 결혼 생활의 문제에 관한 그간 부부의 대화 영상을 짐작하게 한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찰리는 거실로 내몰리고 마침내 니콜을 직면해 자폭한다.(p.116)


▮ ‘구해줘’  <퍼스트 리폼드>

하지만 내게 <오데트>의 기적은 세계 자체가 들림을 받는 엑스터시였던 반면, <퍼스트 리폼드>의 그것은 ‘이후’를 결코 떠올릴 수 없는 마침표였다. 다시 말해 폴 슈레이더는 끝나는 시점까지 나를 정확히 톨러의 죽음을 향해 데려갔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후 살아남은 톨러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퍼스트 리폼드>의 마지막 숏은 정확히 말해, 포옹과 음악과 카메라의 운동을 갑작스럽게 중단시키는 암흑이다. 인물도 음악도 카메라도 종말을 예견하지 않을 때 스스로의 의지를 행사하며 강림하는 어둠. 나는 순간 어렴풋이 톨러 목사의 일기가 북 뜯기는 음향을 들었다. (p.176)

▮‘생활의 재발견’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반복 자체는 두려워할 저주도 안전한 성도 아니다. 분명한 진실은, 우리가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미덕과 결함을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행위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조금 더 잘 살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그런 우리들의 집에 찾아와 아무것도 안 훔치고 발자국만 남기고 가는 영화다. 언젠가 윤희정의 집에 들었다는 도둑처럼. 아니다. 다시 들여다보니 발자국 말고도 남기고 간 것이 있다. 대동소이하게 반복되는 세계의 얇은 표면에 숨겨져 있는, 우리를 더 큰 자유와 조화로 인도할 신호들이다. 저 반딧불 같은 빛을 내가 정말 본 게 맞을까? 어리둥절하며 눈을 껌벅이는 찰나, 수원의 거리에 종이 울린다. 눈이 내린다. (p.257)


▮‘2인칭 과거시제’ <로마>


<로마>는 그 모든 것을 포함하되 작게 줄이거나 가장자리로 밀어둔다. 이는 부정의 제스처와는 다르다. 다만 이번만큼은 정치운동가도, 마법사도, 창공의 육중한 비행기도 주인공이 아니다. 쿠아론은 모든 진보와 각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것을 즉각적으로 체험하게 해주었던 노동의 손길을 환기시킨다. 땅바닥에서 시작한 <로마>는 올려다본 하늘의 이미지로 끝난다. 여행을 마친 클레오는 빨랫감을 들고 한 발 한 발 철제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사라진다. 소박한 승천이다. <로마>의 맺음말이 서구 문명의 폐허를 돌아본 T. S. 엘리엇의 긴 서사시 「황무지」의 마지막 구절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샨티 샨티 샨티. (p.278)


▮‘일주일, 하루, 한시간’ <덩케르크>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나를 감정적으로 가장 고조시킨 것은, 예상대로 연료가 다한 전투기의 프로펠러가 공중에서 멎는 순간의 정적이었다. 요트와 어선이 덩케르크 해안으로 다가오는 숏은 우리를 간절히 귀향을 기다리던 병사 입장에 세워 감격의 큐 사인을 보내지만, 화면안 영국인들은 손조차 흔드는 일 없이 단호하고 담담하다. 영국 시민의 군상 가운데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갑판에 서서 야무지게 전방을 주시하는 이름 모를 여성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영국판 같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생각하는 ‘덩케르크 정신’은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각자의 위치에서 감각한 전쟁의 총합. (p.29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토리노의 말>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니체 말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말을 토리노 길거리에서 마주친 다음 발작을 일으켜 10년간 정신착란을 앓다 운명했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하다(그리고 이 암시는 영화 중반부에 극 중 인물의 독백으로 재차 확인된다.) 니체는 말의 고집에서 극단의 회의를 보았고,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이 처한 근원적 절망을 본 것이다. <토리노의 말>의 관객은 도입부에서 니체를 쓰러뜨린 문제의 말—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영화적으로 제시된 말—이 끄는 수레를 따라 평원의 오두막까지 인도되고, 거기서 나머지 상영 시간을 보내게 된다. (p.299)


▮ 첫사랑의 추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다행히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만든 사람들은 인생 최초로 몸과 마음을 던져 사랑을 경험했던 시간을 아직 자세히 기억하는 성인들이다. 영화는 엘리오의 시점 숏이나 클로즈업을 티 나게 쓰지 않고도, 욕망의 제스처와 움직임으로 충만하다. 변모하는 자신의 몸을 생경해하며 체모에 입김을 불고 쓰다듬어보는 무료한 한낮, 시선을 감추려 짐짓 걸치는 선글라스, 돌기둥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걷는 동안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해 소년을 행복하게 하는 올리버의 이미지. 사랑이라는, 사건 없는 사태. 사내들끼리의 흔한 부딪힘인 척 올리버의 주위를 겅중겅중 맴돌다가 등에 올라타고 다시 화들짝 뒷걸음치는 엘리오는 마치 어린 골든리트리버 같다. (p.100)


▮ 매직 캐슬의 파수꾼 <플로리다 프로젝트> 


실제 로케이션에 촬영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프레임은 연보라와 오렌지, 플로리다의 환한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혹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현실의 어둠과 배치되는 컬러의 역설에서 찾겠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숀 베이커는 그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장소의 공기를 주민의 눈으로 포착할 줄 안다. 저예산 영화 다섯 편을 만들며 세트 없이 인물의 생활공간에서 영화적 긴장을 발견해온 경험은 그의 커다란 자산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많은 숏은 성인의 허리께에 오는 아이들의 눈높이로, 순진한 흥분과 거기에 무심한 세상의 압도적 사이즈를 전한다. 그러나 숀 베이커는 특정 스타일에 고착된 감독은 아니다. 존재감이 엷고 기동성 높은 스마트폰 촬영으로 비전문 배우의 거침없는 연기를 따라잡고 부추겼던 <탠저린>과 대조적으로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주의 깊은 블로킹(가장 효과적인 화맨 배치를 위해 대사의 어느 지점에서 배우들의 동작이나 동선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과 프레이밍이 만들어낸 숏으로 지지된다. 어린 배우들에게서 의도한 결과를 끌어내는 데에 실용적인 방식이기도 하다.(p.109)



▮ ‘자본주의의 최약자를 사랑하다’ <옥자>


동물에 인간이 가하는 불필요한 고문은 어떻게 도살하느냐보다 도살까지 어떻게 살게 하느냐에서 현저히 드러난다. 돼지의 머리에 한 번의 충격을 가해 숨을 끊는 <옥자>의 도살장은 현실에 비해 차라리 인도적인 편이다. 우리를 한결 몸서리치게 하는 이미지는 검고 축축한 땅에 철조망을 두르고 발 디딜 틈 없이 돼지들을 가둬놓고 나치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옥자>의 축사다. 몇 해 전 <가디언>은 “무시무시한 낙농업(Dairy is Scary)”이라는 기사로 공장제 축산의 그늘과 대안을 다루는 보도를 꾸준히 이어갔다. 이 기사에 따르면 영국 젖소의 경우 암소는 생후 15개월부터 젖을 내기 위해 끝없이 강제 인공수정을 당하고 출산 36시간 이내 송아지를 빼앗긴다. 수송아지는 바로 죽임을 당하거나 몇 달의 말미 후 송아지고기가 되고, 암컷은 엄마 소와 같은 순환 지옥에 들어간다. 이들의 삶은 자연수명의 5분의 1이다. 옥자 역시 인간으로 치면 강간에 해당하는 폭력과 강제 교미를 당하고 <모노노케 히메>에서 총에 맞은 멧돼지 신이 그랬듯 포악해진다. (p.166)


다음 [낭독&필사클럽] 안내입니다. 

https://blog.naver.com/bhhmother/22297333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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