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델리아 오언서, <가재가 노래하는 곳>

by 뭉클

이적의 노래 '거짓말'을 듣고 있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

노랫말은 떠난 사람의 뒷모습보다 남겨진 사람의

시간이 먼저 눈에 밟힌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 잠깐이면 된다는 위로.

그러나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도 길을 잃었는지

돌아오지 않는다.

남는 것은 약속의 잔향과 당신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존재만 미련하게 남겨졌을 뿐이다.

노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낡은 문 앞에 앉아 꼼짝하지 않는 강아지 한

마리. 주인은 떠났고 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지만,

아이는 그 앞을 떠나지 않는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움직이지 않는 기다림에는

계산이 없다. 다만 자신이 믿었던 시간을 온몸으로

붙들고 있을 뿐이다.

노래는 점점 더 춥고 더 쓸쓸하게 흘러간다.


유튜브에는 이런 말 없는 그들의 세계가

알고리즘을 타고 나를 찾아온다.

빈 집 앞에서, 보호소 철창 앞에서,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여전히 주인을

기다린다.

입양된 레트리버가 수십 킬로미터를 돌아 옛 주인

집을 찾아온다. 길 위에서 새끼들을 먹이다

탈진해 쓰러지는 어미 개의 정은 눈물다.

학대받다 구조된 새끼 고양이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등을 핥아주는 어른고양이의 위로는 따뜻하다 못해 속 깊다.

입양된 새끼를 밤마다 찾아와 안부를 확인하고

돌아가는 어미개와 다친 새끼 강아지를 물고 와서

사람 앞에 놓고 맡아달라고 애원하는 어미개의

눈빛까지 그들 세계의 삶이 랍도록 인간적이고

저마다 눈물겹다.

자식을 양육하는 그들의 헌신과 사랑, 그 정성에

반응하는 아이들 그리고 사람 가족에 대한 신뢰가

인간의 감정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 처절하고 더 크게 마음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감동은 이내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누가 더 인간적인가.

우리 집에는 고양이 '또또'가 산다.

첫 주인은 우리에게 또또가 실은 듣지 못하는

장애묘임을 말해주지 않았다.

또또가 마음을 열고 우리와 함께 하는 시간은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또또를 키우며 나는 매일

깨닫는다. 소리가 닿지 않아도 감정은 흐른다는

것을.

또또가 우리가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우리가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는 것 같다.

건네는 손길이 어떤 보살핌인지 온몸으로 감각하고

반응한다. 눈을 맞추고 곁을 내어주는 그 작은 몸짓

속에는 언어를 뛰어넘는 신뢰가 담겨 있다.

소리가 없어도 사랑은 읽히고, 말이 없어도 관계는

단단해진다.

사람들은 인간만이 고등한 휴머니티를 가졌다고

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과 언어의 로고스를

지닌 동물이라 정의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주 유려한 언어를 사용해 약속

저버리고, 상황을 핑계 삼아 관계를 정리한다.

반면 동물은 변명하지 않는다.

또또처럼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큰 상처를 입어도,

그들은 다시 손을 내밀고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린다.


휴머니티란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인가,

아니면 변함없이 헌신하고 곁을 지키는 태도인가.

이 질문은 델리아 오언서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소녀 카야에게로 이어진다.

카야는 술 취한 아버지의 폭력과 그 폭력을 견디다

못해 하나둘 떠나버린 엄마와 형제들 틈에서, 말

그대로 남겨진 아이였다.

가장 안전해야 할 울타리에서 가장 먼저 배제된 그

고독은 버려진 강아지나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습지 소녀’라 부르며

경계하지만, 인간 공동체가 차갑게 등을 돌릴 때

그녀를 품은 것은 오히려 거친 자연이었다.

조수의 흐름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갈매기는

계절을 알려주며, 조개껍질은 변함없이 아름답다.

인간 사회는 그녀를 주변부로 밀어냈지만, 자연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다.

소설은 묻는다.

누가 더 야생인가?

홀로 살아남은 아이인가, 아니면 약한 존재를

너무도 쉽게 지워버리는 잔인한 사회인가.

작품의 막바지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나지막이

권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가라.
인간의 소음이 닿지 않는 자리, 낙인이 이름이 되지 않는 곳으로.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가라고 한다.

그곳은 인간의 소음이 닿지 않는 곳, 누군가에게

붙여진 낙인이 이름이 되지 않는 곳이다.

이 말은 도망치라는 명령이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는 간절한 권유다.

배제의 자리에서 무너지지 말고, 더 깊은 본연의

자리에서 자신을 회복하라는 뜻이다.

버려진 동물들도 어쩌면 그렇게 멀리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배신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다시 숨을

고르고, 새로운 손길 속에서 신뢰를 배우며,

상처가 자신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

우리 집 또또가 소리 없는 세상 속에서도 내 손길을

믿고 잠이 들듯, 그들도 다시 살아갈 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마음 한편은 여전히 아프게 묻는다.

그들이 굳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 수 없는 걸까.

기다림이 거짓말로 끝나지 않는 그런 상.

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밀려나지 않는 공동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대단한 지성이 아니라,

곁을 지켜주는 단순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휴머니티는 종의 특권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더 약한 존재를 대하는 방식,

떠난 뒤의 책임을 감당하는 용기,

끝까지 함께하려는 결심.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말할 줄 아는 동물일

뿐, 결코 인간적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돌봄과 보호의 손길을 기다리는 반려동물들의

눈빛을, 그리고 내 손길에 가만히 고개를 맡기는

또또의 온기를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 특정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더 나은 인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믿는 일이 더 이상 위험이 되지 않는

세상.

그 세계를 만드는 일은 결국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