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서 시작된 한 인물이 여진족의 땅에서 황제의 조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나요? 금나라를 세운 시조, 완안 함보의 놀라운 역사를 살펴봅니다.
1. 정리
중원에서 처음 한족을 밀어내고 패권을 차지한 금나라 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는 전설이나 야사가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금나라가 세워졌을 때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기록된 역사다. 고려에서 온 신분으로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연도를 계산해 보면 그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조선 유학자 김세렴은 아골타를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 최고 가문인 권행의 후예라고 했다. 권행의 본래 성은 김씨. 즉 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 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 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 그의 성은 김씨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아골타도 발해유민 장호를 새 수도 북경의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금나라는 대제국을 경영한 발해의 경험을 통해 국가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1606년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한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황제의 성(姓)인 아이신 줘러에서 아이신(愛新)은 금(金), 줘러(覺羅)는 겨레(族)를 의미한다. 결국 금부족, 김씨라는 뜻이다. 청 황실 또한 김(金)씨임이 확인되는 셈이다.
2. 연보 :
발해 멸망 926년
신라 멸망 935년
금나라 건국 1115년
요나라 멸망 1125년
완안 함보(完顏函普)는 복간수 완안부의 1대 추장으로 금나라 황실의 시조이다. 고려인 금행(今幸)의 아들 금준(今俊)이기도 하다. 1136년, 시조(始祖), 경원황제(景元皇帝)로 추존되었고, 1142년에, 함보의 묘를 광릉(光陵)이라 칭하였다. 이듬해인 1143년에, 시조(始祖) 의헌경원황제(懿憲景元皇帝)로 증시되었다.
《금사》에 따르면, 고려인 함보가 고려인들을 이끌고 완안부에 이르러 오래 거주하였는데, 그 고려인 부민들은 일찍부터 만주족 사람들을 죽였고 만주족 여성들을 탈취하여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민들이 함보에게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만주족 여성들이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정식 완안부민으로 받아줄 것을 제안하자 함보는 승낙했다.
함보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이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만일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는 법을 규정했다.
완안부민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 함보에게 청우 1마리를 주고 귀한 만주족 여성들을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신록기》에 따르면 그중에 가장 귀한 만주족 여성의 나이가 40세였고, 성은 결도고단(結徒姑丹)씨라고 한다.
함보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결도고단씨 일가에 보낼 혼례 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결도고단씨는 우마로서 농작기구를 재물로 사용하여, 마침내 함보는 그녀와 혼인하였다.
3. 추정
완안 함보는 신라인 권행의 둘째 아들로 추정. 고려 건국 시 공로로 어쩔 수 없이 권씨로 사성을 받은 신라 왕족 김행의 일가는 건국 후 100년 동안 출사하지 않았다. 그걸로 보아 왕족 출신으로서 의리와 자긍심이 대단히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대금 시조 완안 함보가 사라진 권행의 둘째 아들 김준으로 보기도 한다. 권씨 족보인 성화보에도 권행 이후 10대 정도는 불분명하게 표기되어 있다. 아마도 장남만 남겨두고 차남 일가는 식솔을 거느리고 만주의 여진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싶다.
4. 평가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와 그의 조상 함보가 신라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흥미롭고도 독특한 연결고리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민족, 문화, 그리고 권력의 이동이 단순히 정치적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적 관계와 혼합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나라의 시조인 완안 함보가 신라인 권행의 후손이었다는 주장은 여러 역사적 사료에서 언급되며, 이는 금나라가 고려 및 신라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함보가 여진 부족 내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결혼을 통해 부족 간 화합을 이끌어낸 이야기는 당시 그의 리더십과 지혜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함보가 신라인 혈통이었음에도 여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과정은 그가 단순히 외부 이주자가 아니라, 현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조화를 이룬 인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더 나아가 금나라와 발해의 연결은 흥미로운 문화적, 정치적 융합을 보여줍니다. 발해 출신 여인들이 금 황실의 왕비로 들어가고, 발해 유민들이 금나라 건설과 운영에 참여한 것은 금나라가 단순히 여진족의 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적 배경과 문화를 포용한 다민족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청나라 황실의 성인 '아이신 줘러'가 '금의 부족'을 의미하며, 금나라와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점도 동아시아 왕조사의 연속성과 유대를 엿보게 합니다. 금나라에서 시작된 이 김씨 혈통이 결국 청나라 황실에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놀라운 연쇄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신라와 발해, 고려, 여진, 금, 그리고 청나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문화적, 정치적 상호작용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함보와 아골타의 이야기는 특정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융합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5.주석 :
이 이야기는 금나라 정사인 '금사'와 송나라 시기의 기록인 '송막기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