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글이 만든걸 먹으라고?
3월의 시작을 편하게 맛있는 것을 먹는 해방으로 시작하니 (지난화 참조) 디저트를 향한 욕망도 덩달아 같이 타올랐다. 이미 브레이크 걸기 늦은거 같아 이참에 그냥 주말마다 디저트 버킷리스트 지워나가고 있다. 갑자기 미식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이 낯설지만 회사노비, 도시락노예가 일탈하지 않고 묵묵히 평일을 버티는데 이정도는 정당한 주말성과급이라며 되려 큰소리친다.
직접방문은 주말에 하고 온라인주문은 수, 목에 넣어 주말에 맛보는데 3월이 아직 남았음에도 이런 긴 맛도리 리스트가 생겼다.
1. 포포 브레드(합정)
2. 달냥(혜화)
3. 비건마마(설대입구)
4. 심심브레드(칠곡)
5. 여름빵학(잠실롯데팝업)
6. 러빗박스(암사) 인생 첫 버터바
7. 장인 손약과(N+스토어) 원조논란의 중심, 그 장인약과
8. 볼비 두유그릭요거트(N+스토어) 인생 첫 그릭요거트
9. 기메브레드 (N+스토어)
10. 잇포레스트 (N+스토어) 인생 첫 두바이 쿠키
이쯤되면 머릿속 램메모리가 온통 주말에 먹을 맛도리 궁리에 포화되어 다른 생각은 제대로 처리가 안된다. (한번 빠지면 끝장을 봐야 사그라든다) 그렇게 정신없는 평일이 지난 어느 토요일, 뉴스에서 백화점 오픈런 광경에 혀를 차던 내가 잠실롯데 지하 식품관 앞에 10시 15분에 줄을 서고 있었다. 10시30분에 정문이 열리자 '여름빵학' 팝업부스로 돌진해 신나게 제과를 쓸어담고 선착순 10명에게 주는 후무스샘플을 9번째로 받게되었다. 한껏 신나한 것도 잠시 마침 지나가던 행인들 중 하나가 '와 이빵순이들 좀봐'라고 했을때 들떴던 기분은 바로 바닥에 패대기 쳐졌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신경쓰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제 정신이 돌아온 순간이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일상을 반복하던 도비가 디저트에 미쳐 정신못차리는 모습을 소개하며 글을 시작해 보았는데 오늘의 주제는 비건디저트의 혈통에 관한 것이다.
걸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가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공개했을때 그녀의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일부 해외 팬 은 전광판 트럭을 대절해 직접사과하라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걸 본 대중들은 팬들의 실망은 이해하지만 아이돌도 사람인데 연애할수도 있는 거지하며 카리나를 두둔해 주었다. 그러자 찐팬들은 '돈은 팬이 쓰고 용서는 머글이 한다'며 자조섞인 탄식을 했다.
위의 에피소드의 키워드는 카리나도, 공개연애도 아닌 바로 '머글'이다. 머글이 뭔지 몰라도 내용을 보면 감이 온다. 그다지 에스파와 카리나에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서 관대한 듯 용서하는 대중들이 열혈팬드에겐 뭣도 모르는 '머글'인 것이다.
원래 머글(muggle)은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처음 나온 표현이다. 영국에서 mug는 잘 속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 판타지 마법세계의 마법사들은 마법도 할줄 모르는 미개한 일반인을 '머글'이라고 불렀다.
책의 인기와 함께 '머글'도 세계 여러나라, 여러 언어에서 재미나게 활용되고 있다. 머글의 쓰임새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지만 적어도 이 조건은 반드시 충족해야한다. 그것은 숫적으로 열세한 소수집단이 자신들을 몰라보는 다수를 어리석게 여기며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이다.
어느 사회영역이나 대다수의 주류그룹과 다른 특성의 소수그룹이 공존하는데 식생활에도 마찬가지다.
인류에서는 잡식을 하는 이들이 주류다. (여기서 '잡'은 가리는 것 없이 모두 먹는다는 omnivore의 omni이다.) 그 중에서 이거 안먹고, 저거 안먹고 하는 사람들을 따로 분류하면 그 중에서 동물성 식재료나 동물 부산물(유제품, 난류)을 모두 먹지 않는 비건은 가장 소수의 집단이 된다.
해리포터의 세계관을 여기에 응용해보면 소수인 비건인이 마법사가 되고 다수의 잡식인은 머글이다. (물론 세팅은 하는사람 맘대로라 고기만 먹는 사람을 마법사라 하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이렇게 단어의 배경부터 활용까지 설명하며 기본적인 밑밥을 깔았으니 여기서부터는 편하게 비건이 아닌 식생활 추구자를 머글*이라 퉁쳐서 부르겠다.
(*주의 - 머글은 이글의 재미를 위해 만든 호칭일뿐 무엇을 먹는게 옳고 그름을 정해 차별할 의도가 없음을 미리 알려드림)
내가 완전채식이 된 2016년도에는 비건이라는 말도 생소했고 비건식당이나 빵집을 발견하는 건 보물찾기였는데 9년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변했다.
내가 관심이 없어 몰랐던거지 인스타에 채식, 빵 키워드로 조금만 뒤적이면 비건베이커리가 우수수 걸려들어 오히려 결정장애를 유발한다.
이런 변화와 함께 나타난 다른 특징은 이제 비건베이커리가 더이상 비건베이커만의 독점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최근 먹은 비건제과, 제빵샵 중 (약과, 요거트제외) 비건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은 한 20% 될까 말까한다. 이제는 머글 베이커가 비건베이커리 시장의 주류가 되었다.
동물성식재료와의 혼합을 허락하지 않는 비건은 평소에는 맘껏 혼합하여 먹는 머글 쉐프가 만든 비건디저트를 어떻게 생각할까.
옛드, 꽃보다 남자를 보면 초상위재벌집 아들래미 구준표가 서민 머글인 금잔디네 집을 방문한 에피소드가 있다.
비유하자면 나에게 머글표 비건디저트는 구준표 눈앞의 콩자반처럼 낯설었다. 식당이나 베이커리를 한다면 제일 자신있고, 좋아하는 메뉴를 하는게 보통인데 평소 먹거리는 동물성을 같이 즐기면서 디저트만 채식스타일을 좋아할 수도 있는지 궁금했다.
포포브레드 사장님이 치즈 케잌을 구운 인증샷을 인스타에 올리며 "가끔 속세의 맛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이목을 끈 것은 비건빵집에서 구운 치즈케잌이 아니라 사장님은 자신이 만든 비건 빵이 속세의 맛이 아니라고 여기는 표현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설레이는 속세맛을 보여준 빵들이었는데 그걸 만든 머글 사장님은 몸의 건강을 위해 맛을 조금 양보하셨다는걸까?
사장님이 재미를 위해 올리신 포스트겠지만 최근 비건디저트계에서 머글파티쉐가 급증한 이유를 옅볼 수 있었다. 비지니스 관점에서 비건베이커리는 건강식품 혹은 체중관리의 기능성 식품으로 포지셔닝하는 것이 마케팅에 유리하다. 그래서 건강한 재료를 썼으니 디저트에 대한 죄책감 내려놓고 먹어도 되고, 살도 안찐다는 뉘앙스를 간접적으로 어필하고있다.
실제 많은 머글 사장님의 인스타를 보면 자기가 만든 빵, 쿠키를 맘껏 즐기면 살도 빼고 건강해 졌다는 스토리 한두개쯤은 올라와 있다. 심지어 비포 애프터 사진까지 보여주기도한다.
이들 스타 머글파티쉐를 따르는 많은 팔로워들은 맛도 만족하지만 비건 디저트니깐 안심하고 먹게된다는 찬양 후기를 남긴다. 물론 팔로워들도 대부분 머글이다.
내 눈엔 비건베이커리사장님의 건강과 핏함은 평소 사진밖에서 드시는 풍성한 비가공자연식(whole food)과 운동, 그리고 좋은 생활습관 때문이지 그분들이 만든 디저트에 큰 지분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비건말고 다른 디저트 선택지가 없는 나는 단지 디저트가 먹음직스러워 골랐을 뿐인데 얼떨결에 이 건강기능식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상황이 연출된다.
비록 비건베이커리가 어필하는 방향이 내 생각과 다르긴 하지만 비건디저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지금 당신이 먹는 스콘과 쿠키는 곡식의 가루를 주재료로 해서 기름(압착하든, 핵산으로 녹이든)과 첨가당(메이플시럽, 아가베시럽, 조청, 원당, 코코넛슈가 모두 포함)을 섞어서 달큰하고 고소하고 파삭하고 꾸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에너지 밀도가 높아요. 이런 식품들은 건강, 체중조절, 이런 말과 어울리지 않아요!....라는 입바른 말로 그들의 즐거운 기분을 망치지는 않는다.
어차피 머글의 식생활에서 이보다 더한 초가공식들이 널려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비건디저트는 빌런 축에도 못들지도.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디저트 본질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져 비건디저트의 인기가 식기라도 한다면 지금 비건디저트의 풍요로운 상황은 사라질것이다. 그럼 난 또 빵하나 먹자고 온 오프라인을 뒤져야 하는 암흑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예전에 비건빵집에서 만난친구가 '웬지 이 빵은 많이 먹어도 될거 같다'며 날 쳐다봤을때 난 부정도 긍정도 안하고 빙긋이 웃었다. 난 머글에게 '넌 머글이야' 라고 지적질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머글 사이에 끼어 머글이 만든 비건 디저트를 즐기는 영리한 마법사가 되기로 한다.
해리포터를 읽은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머글은 그 대상의 열등함이 아닌 남들을 머글이라 낮춰 부르는 사람의 편협함을 희화화하는 단어이다. 주인공 해리포터도 머글 출신이라는 것이 그 증거다. 소수의 그룹이 다수를 머글이라 부르며 애써 무시하지만 정작 다수는 머글이라는 단어도 그들을 머글이라고 부르는 존재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영국사회는 마법사가 아닌 머글이 이끌어간다.
다수를 머글이라 부르는 소수의 순수한 그룹은 어찌되었든 생존경쟁에서 불리하다. 마치 동네 믹스견 황구가 고귀한 혈통의 세인트버나드 보다 3배는 더 오래사는 것처럼 말이다.
비건인 난 전쟁나면 굶어 죽기 딱 좋은 조건이다. 이거 안먹어요 저거 안먹어요 하는 유전자는 그 까다로움때문에 후손으로 전달이 힘들고 그래서 비건이 극소수인지도 모르겠다. :)
내가 환경과 윤리를 고민하며 먹고싶은 음식을 골라 먹으며 남들을 머글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그럴 수 있게 도와주는 풍요로운 조건 덕분일지 모른다. 이런 주위 상황은 배제하고 그저 순수함만이 지구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는건 오만이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0.1프로도 안되는 소수자의 영혼을 끌어모은 행동이 아니라 99.9프로의 다수가 일상에서 가볍게 보여주는 변화다. 한명의 비건이 평생 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는 것보다 수십 수만의 머글이 고기를 한입 양보했을때 임팩트가 더 크다.
이야기가 산으로 간듯 한데 결론적으로 난 비건디저트에서 교차오염만 없다면 파티쉐가 비건이든 아니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때론 머글의 비건디저트가 더 맛있을 때도 있다. 비건 버터바 샵을 방문했을때 사장님과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 중에 자신이 플렉시테리언이라 귀뜸해주셨다. 비건이라 못먹을 줄 알았던 버터바를 사장님 덕분에 먹게 되었는데 그분이 비건이 아니라는 건 불편할 포인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버터바를 드셔보셨으니 버터바의 맛 포인트를 잘 잡으셨을테고 그 맛을 경험하게 해주어 감사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온라인 장바구니에 심혈을 기울여 쿠키를 고르고 있다.
참고로 이번 쿠키집은 비건 쿠키, 비건크래커 라인외에도 오프라인 일반 케이크샵을 운영하고 식단용 일반 단백질 쿠키까지 출시한 이름있는 빵브랜드 소속이다.
내가 고르는 비건쿠키라인은 확고한 골수팬들이 있고 많은 리뷰에 이렇게 맛있는데 식단도 가능한 쿠키라며 입을 모아 칭송한다. 진짜 '맛있는 쿠키'라는 것은 분명히 검증되었으니 나머지 건강식단 부분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머리속은 이미 속세의 뽀또맛을 선사해줄 시그니처 황치즈 초코칩쿠키에 대한 기대감으로 꽉 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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