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의 다양한 형태
진실은 어디에 있는 걸까?
같은 시간, 같은 사건을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주는
영화나 소설이 있다.
이야기는 반복되지만
화자가 달라지는 순간
같은 이야기는 더 이상 같지 않다.
누구의 말이 맞는 걸까.
혹은,
진실은 애초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사전에 따르면
'왜곡'은
사실을 바탕으로 형태를 바꾸는 것이고
'거짓말'은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다르지만
둘 다 ‘참’은 아니다.
▶ 왜곡 1. 작정한 거짓말
★영화 『라쇼몽』
1950년에 개봉한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로
두 편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한 살인 사건을 두고
네 사람이 전혀 다른 진술을 한다.
이상한 점은
죽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무려 세 명이라는 사실이다.
불과 하루 이틀 전의 사건이므로
기억이 흐릿할 리도 없다.
그 숲에서 일어난 사건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무꾼이 있으니
독자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라쇼몽 현상'이란
하나의 사건을 자신의 처지에 따라 달리 해석하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거짓말로 보인다.
그러므로
좀 더 라쇼몽 현상에 가까운 것은
영화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 왜곡 2. 보이는 대로 판단할 때의 오류
★영화 『괴물』
초등학교 5학년 2반의
'미나토'와 '요리'
두 소년을 둘러싼 사건들을
미나토의 엄마, 담임 선생님, 미나토
세 사람의 시점으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엄마는 아들 미나토를 피해자로
교사는 미나토를 가해자로 본다.
다정한 엄마와 친절한 선생님 모두 좋은 성품의 사람이지만,
자신이 본 것만을 근거로 판단한다.
그 결과
확증편향은
진실을 가린다.
▶ 왜곡 3. 세상의 중심은 나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14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실화.
한 사건을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시점으로 나눈다.
1장.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
2장.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
3장.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앞선 두 장이
‘누가 어떻게 기억했는가’라면
마지막 장에서는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가 된다.
▶ 왜곡 4. 나까지 속이는 기억
★ 영화 『메멘토』
주인공은
10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몸에 문신으로 기록을 남기면서까지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추적해
끝내 범인을 찾아낸다.
하지만
주인공이 찾아낸 범인과
관객이 찾아낸 범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이 영화는 여러 면으로 훌륭한데
내게는
극한의 이기심에 대한 부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와 중에도
자신의 잘못을 지우거나, 왜곡해 가면서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덮어 씌운다.
감쪽같이 자신을 속여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얼마나 지독한 자기애인가......
★ 테드 창의 소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이 저장되고
궁금한 것이 있어 단어로 검색하면
관련 기억이 망막에 좌르륵 뜨는
‘리멤’이라는 기억보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시기의 이야기다.
나는 딸이 한 말로 인해 크게 상처를 받는다.
나를 원망하고 비난한 딸을 용서하기 어려웠지만,
결국 내가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한 끝에
그나마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멤’을 통해 확인해 보니,
폭언을 한 사람은 딸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고,
관계가 회복된 것도 딸의 노력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왜
가해자인 자신을
피해자로 기억할까.
죄책감을 감당하기 힘든 나를 위해,
내 뇌가
기억을 조작한 것이다.
눈물겹다.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
▶ 왜곡 5. - 너의 비하와 나의 미화
★ 소설 『트러스트』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인물을 두고
소설, 자서전, 회고록, 일기를 차례로 배치한다.
1부 '채권'
소설가가 발표한 소설로 사실과 허구를 섞어
독자가 허구도 사실처럼 느끼도록 유도한다.
2부 '나의 인생'
1부 소설 속 자신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겠다는 각오로
대필작가를 통해 쓴 자서전이다.
자신을 미화하는 또 다른 왜곡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는 부끄럽지 않다.
본능적 이기심은
거짓을 기억으로 바꿔버린다.
3부 '회고록을 기억하며'
자서전을 대필한 아이다가 쓴 글로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픽션을 더한다.
4부 '선물'
아내가 쓴 일기다.
누군가는 타인을 깎아내리고,
누군가는 자신을 미화한다.
왜곡은
피할 수 없는 걸까.
보는 사람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체념해도 될까.
영화 '라스트 듀얼'에서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중요한 장면이 있다.
'3장,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화면에서
잠시 후
'마르그리트가 말하는'이 스르륵 지워지고
"진실"만이 남는다.
영화는 분명히 말한다.
진실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고.
'라쇼몽'에서는
모든 사건을 목격한 나무꾼을 통해서
'괴물'에서는
당사자인 미나토를 통해서
'라스트 듀얼'에서는
마르그리트를 통해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에서는
주인공이 리멤을 통해 직접 진실을 발견한다.
'트러스트'에서는
밀드레드의 일기를 통해 보여준다.
진실은 있다.
찾기 어려울 뿐이다.
한 사람이
어느 집단에서는 영웅이 되고
다른 집단에서는 악당이 된다.
내 말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왜곡되어 전해지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왜곡은
도처에
넓게, 깊게 자리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내 감정만 보호하면서
확증편향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본능적인 자기 보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인 것이 다 옳고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무고한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왜곡의 최소화를 위해
내 안의 수정체를 갈고닦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