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금빛 종소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가가 쓴 글이 아니라
소개한 어떤 에피소드였다.
★
찰스 디킨스의 『오래된 골동품 상점』이 연재되는 동안 영국에서 실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그 명성은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까지 건너갔다. 많은 고초를 겪은 '천사 같은 소녀' 넬의 운명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1841년, 마침내 마지막 연재 분량이 담긴 잡지를 실은 영국의 배가 뉴욕의 항구에 닿았다. 항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가 배에 탄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넬은 살아 있나요?!"
★
때는 1841년,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이니
영국 작가가 쓴 책이 미국까지 가려면
배를 타야 했던 것.
연재되는 이야기였으니
(아마도 한 달에 한 번이었겠지?)
영국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목 빼고 기다렸을까?
더군다나 마지막 호였으니.
궁금증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항구까지 달려가서 기다리고,
배에 탄 사람들이 내리기도 전에
소리쳐 물었다는 것이다.
"넬은 살아 있나요?"
나 역시 그렇게 이야기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가끔,
'이게 사실인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것 중에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의 고향은
지금은 전주에서 30분 거리지만
어렸을 적엔
하루에 버스가 다섯 대 들어오던 시골이었다.
전기가 없으니
tv도 없었고,
건전지로 연결해서 듣는 라디오가 전부였다.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해 질 녘, 5시 무렵이면 모두 우리 집 마루에 모였다.
엎드려 머리 맞대고
라디오에 귀를 바짝 대고 연속극을 들었다.
'태권동자 마루치', '손오공' 같은 드라마였는데
파란 해골 13호가 등장하면 다들 덜~덜~ 떨었고
손오공이 하늘을 날거나 여의봉을 꺼내면
흥겨워서 어쩔 줄 몰랐다.
내일은 어떤 모험이 펼쳐질지 이야기하며
다시 밖으로 뛰어 나가던 그 시간들.
지금도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검색해 보니 이런 글이 있다.
「원작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MBC 라디오 연속극 '태권동자 마루치'로, 1970년대에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국민학교 학생들이 이 연속극이 시작하면 모두 다 집에만 있을 정도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나는 유달리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들...
'헨젤과 그레텔'의
빵가루를 새들이 쪼아 먹어 버렸을 때,
뜨거운 솥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고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었을 땐
몇 날 며칠 슬퍼서 앓아누울 정도였다.
엄지공주는 얼마나 작을까 골똘히 생각했고
하이디, 소공녀의 세계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주변에 책이 많았다면
그야말로 문학소녀가 되었을 텐데...
그때는 학교 도서관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것이
무척 아쉽다.
초등학교 시절,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큰언니는
토요일에만 집에 왔는데
언젠가부터
『소년중앙』이라는 두툼한 월간지를 사다 주었다.
읽을거리에 굶주려
새 교과서도 하루 만에 다 읽던 내게
그 잡지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우리 마을에서 그런 잡지를 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친한 친구에게만 빌려주며 으쓱해하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미미와 나나'라는 연재만화였다.
『소년중앙』이 발간될 즈음이면
한참 전부터
이미 캄캄해진 길에 나가
언니가 타고 올 막차를 기다렸다.
사실
언니가 들고 올 '이야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행복한 기억이다.
언니에게
“용돈도 부족했을 텐데 어떻게 매달 그것을 사다 줬냐”라고 물었더니
정작 언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영화를 봤다.
다 보고 나오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영화를 이렇게도 만드는구나..."
"감독이 천재다 천재"
그 영화는 2008년에 개봉했다가
최근에 재개봉한 「더 폴; 디렉터스 컷」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스턴트맨 로이는 같은 병원에 입원한
호기심 많은 소녀 알렉산드리아에게
매일 다섯 무법자의 환상적인 모험담을 들려준다.
이야기는 소녀의 상상 속에서
빛나고, 흔들리고, 현실과 뒤섞인다.
감독이 20여 년 동안 준비해서 만든 영화로
cg를 거의 쓰지 않았는데도
어마어마하게 환상적으로 아름다워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안 보면 자기 손해일 정도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소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말했다.
「인간이 지금처럼 강해질 수 있게 된 이유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만이 낯선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믿기 때문이라고.
그리하여
국가, 종교, 돈... 등이
만들어지고 통용될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는 힘이 세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가 21세기의 책 100권을 선정했는데,
그중 1위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중
첫 번째 책인 『나의 눈부신 친구』였다.
네 권, 2414쪽.
나는 두 주 동안 그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페란테는 이렇게 말한다.
「크고 작은 재능을 가진 작가들이 허구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그것을
진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허구를 통해 표현하기 힘든 진실을
지극히 충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깊이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린 시절 어둑한 길에서
언니가 들고 올 잡지를 기다리던 마음,
해 질 녘 마루에 모여
라디오 연속극에 귀를 기울이던 시간들,
책 속 세계에 며칠씩 빠져 살던 작은 나.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이
내 안에 같은 하나의 결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에 매료된 사람이다.
허구가 품은 진실을 믿고,
그 진실이
사람을 살리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열렬하게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