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시월

투명에 가까운 파랑, 앤 블루

by 흰머리소녀

영국 왕 헨리 8세는

현명하고 온화하여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왕비 캐서린과

이혼을 한다.

이혼을 금지하는 당시 영국의 국교인 가톨릭으로부터

파문까지 당하고

국가의 종교까지 바꿔가며

6년간의 노력 끝에 앤 불린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앤이 왕자를 낳지 못하자

왕은 다시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고

앤을 몰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런던탑에 가두고 만다.

왕비가 된 이후

런던탑에 갇히고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의 시간이

약 1000일.

그래서 앤 불린은 '천일의 앤'으로 불린다.


비운의 여인인 앤 볼린의 이야기는

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반복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전주에서 감곡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까운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가는 길을 택해 출퇴근을 했던 이유는

그 길이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전주에서 금산사 방향으로 고개를 넘어가다가

금평저수지를 끼고

원평 쪽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금산사 ~ 금산초등학교 ~ 금평저수지 구간은

내가 특히 더 좋아하는 구간이었다.


새잎이 돋아나는 봄날에도 좋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에는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는 느낌이었다.

10월 말에서 11월 초 무렵이면

그 구간을 반복해서 오가곤 했다.


까닭 없이 울컥해서 눈물이 날 만큼

길은 매혹적이었다.


'금산초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이렇게 예쁜 길을 곁에 두고

수업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게 가능할까?'

궁금할 만큼,

내가 만약 그 학교에 근무한다면

단풍철에는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몸살이 나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그렇게 좋아하는 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길과

20대의 내 감성의 콜라보로 인해

더 강렬한 느낌으로 남기도 했을 것 같다.


어느 해 가을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찾아갔는데

나무들을 가지치기를 해버려서

아연실색했던 적도 있었다.

가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때,

그러니까 1992년쯤이었을까?

시월 어느 날 오전 10시 무렵,

지금도 즐겨 듣는

kbs 클래식 fm을 들으며

금산사 근처를 지나칠 때쯤

당시의 진행자 유정아 아나운서가 말했다.


"'천일의 앤'의 그 '앤'이

교수형에 처해지던 날,

갇혀있던 감옥에서 나와

교수대로 걸어가다 발길을 멈추고 하늘을 보며

'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라고 했답니다.

목 전의 죽음을

잠시 잊을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파란 하늘...

그래서

아주 파란 하늘빛을 '앤 블루'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파란 시월의 하늘을.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눈앞의 죽음을 잠시 잊을 수 있었을까...

높고 파랗고 슬픈 하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 뒤로

그날처럼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면

그날의 기억과 함께 '앤 블루'가 떠오르곤 했다.

. 투명에 가까운 블루.


나중에

영화 '천일의 앤'을 보다 발견한 사실.

앤은 시월이 아닌, 5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영화에서는

앤이 하늘을 보며 "아... 5월이구나..."라고 말했다.

내가 시월에 그 이야기를 들어

시월의 높고 파란 하늘이라고 단정지은 것이었다.


순간, 당혹스러웠으나

생각해 보니

5월의 하늘도 시월의 하늘만큼 푸르고 높다.


그런데

같은 푸른빛이지만

5월의 하늘은 생기발랄하고,

시월의 하늘은 시리다.

나는 그냥

시월의 파란 하늘빛을

'앤 블루'로 할랜다.


20231031_110754.jpg 작년 시월, 크로아티아

그 푸른빛에 닿고 싶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보고 싶은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