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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Aug 21. 2019

식민 통치가 잉태한 분열,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

르완다 4


1994년을 르완다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 르완다는 이 지구별 안의 어떤 장소가 아니었다고. 르완다는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였다고.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에서 본 짧은 영상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증언을 하고 있었다. 1994년은 약 80만의 주민이 희생된 르완다 제노사이드가 일어난 해다.
 
천 개의 언덕을 지닌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건의 배경은 르완다가 겪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이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유럽 국가는 독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패하면서 르완다는 이후 벨기에의 점령지로 바뀐다. 그리고 콩고에서 고무나무 재배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벨기에는 여기서도 잔인한 통치방식을 택한다. 종족을 차별하는 식민지 분열정책이다.
 
당시 르완다 인구는 후투족이 83%, 투치족이 15% 정도로 구성되었다. 벨기에는 소수파인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만들어 르완다를 대신 통치하기 시작한다. 사실 후투족과 투치족은 외모가 좀 다르긴 하지만(투치족이 키가 크고 피부가 덜 검다고 한다) 오랜 세월 같이 살아왔고 서로 결혼도 하기에 외모로는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양반, 상민 정도의 개념으로 재산을 많이 모으면 후투족이 투치족이 될 수도 있는 등 완전히 분리된 집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벨기에가 부족이 표시된 신분증을 발행하면서 후투족과 투치족은 두 개의 또렷한 계급으로 구분된다. 벨기에가 이 두 부족을 구분하는 방식은 코의 길이를 잰다거나 하는 식으로 매우 원시적이었다. 그렇게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장벽이 생기기 시작한다.
 
르완다가 1959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해서 르완다왕국이 세워지지만 식민지 시절 지배계급인 투치족이 여전히 통치하자 후투족의 봉기가 일어나 르완다왕국은 무너진다. 1662년 공화국이 세워지는데 초대 대통령은 후투족 출신 카리반다였다. 이때 식민지 시절 싹튼 갈등과 분열이 폭발한다. 정부가 투치족을 탄압하면서 투치족에 대한 공격, 추방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르완다에 있던 벨기에 군대는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삼십만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탈출한다. 1964년 1차 제노사이드이다.
 
1973년 쿠데타로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집권한다. 그는 전임자보다 온건했지만 여전히 투치족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지자 1979년 해외에 있던 투치족들이 폴 가가메(현 대통령)를 중심으로 르완다민족통일동맹(RANU)을 만든다. 이는 나중에 르완다애국전선(RPF)이 되고, 1980년대 후반 커피값 폭락으로 르완다 경제가 파탄난 틈을 타서 국내 및 해외 투치족들이 1990년 내전을 일으킨다. 이때 후투족 기득권층은 투치족을 몰살해야 한다면서 후투족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1991년 헌법에서 다당제를 허용하고 1993년 아루샤 조약을 맺음으로써 내전은 종식된다. 하지만 정부 내에서는 투치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파와 권력을 투치족과 나누어야한다는 온건파가 계속 대립하고 강경파들은 후투족에게 무기를 지급한다.
 
1994년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하뱌리마나 대통령이 브룬디 대통령과 함께 평화협상을 논의하러 가다가 암살당한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는데 누가 발사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 하루 뒤에 온건파 총리까지 암살당하면서 르완다는 대혼란에 빠진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를 기회로 후투족 강경파들은 투치족 몰살을 선동한다. 이 프로파간다는 식민지 시절 차별과 공포를 겪은 일반대중에게 먹혀들어갔고 이웃을 무참히 살해하는 참상으로 이어졌다. 2차 제노사이드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대부분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였다. 식민지가 낳은 갈등과 분열의 씨앗이 내전과 제노사이드로 귀결된 것이다.


제노사이드는 일부 지역이 아니라 르완다 전역에서 벌어졌다. 여러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지만 제노사이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건 가짜뉴스를 이용한 여론 선동이었다. 갈등을 통합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오히려 권력 유지를 위해 상대에 대한 증오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권력자들이 언론을 어떻게 이용하고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진은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


@2019


희생자 중엔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벨기에는 식민지 시절, 코의 길이를 잰다거나 하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투치와 후투를 구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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