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새롭게 달라지는 국면이 있다. 내 나이쯤 그것은 ‘기회’이기보다는 ‘위기’인 경우가 많다. 한 소설가는 젊은 시절엔 무슨 일이든 일이나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 이상 회사에 들어가기는 힘든 나이라 남편은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제야 나는 ‘현실’이라는 벽을 눈앞에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원하는 자리에 사무실을 구하는 일부터 요원할 일이었다.
중심가에서 비껴 난 자리도 월세가 만만치 않았다. 좀 더 작은 평수 좀 더 적은 월세 사무실을 찾아 발품을 팔며 나는 자꾸 쪼그라들었다. 매월 월세를 낼 수는 있을까, 그가 원하는 일에 이렇게 투자해도 될까. 그 투자한 일은 언제쯤에나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 희망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만난 책이 바로 <나는 고작 한번 해봤을 뿐이다>이다. 운명을 바꾸는 ‘한번 하기’의 힘이라는 말이 강하게 와닿았다. 책을 살 때 누가 썼는지부터 살펴보고 고르는데 이번엔 단지 제목에 이끌려 책을 샀고 그제야 저자가 EBS PD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했던 <아이들의 사생활>과 <다큐프라임>을 연출했던 PD라는 점도 어떤 인연처럼 생각되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한번 하기’의 힘에 대해 알게 된 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정거장 일찍 내리기. 뇌가 뛰고 위장의 역동이 느껴진다.’
집에서 회사에 가려면 환승을 해서 한 정거장을 가야 하는데, 그날은 그 한 정거장을 그냥 걸어갔다는 것이다. ‘고작 15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쾌한 기분이 뇌를 감돌았고 걷는다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노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진짜 사건’은 다음날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걷기가 출퇴근 ‘습관’으로 굳어졌고 고질적인 통증도 사라졌으며 소화기능이 좋아진 것은 물론 걸으면서 생기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게 됐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평균 독서량이 10권 남짓이었는데 지하철을 이용하고 걸어 다닌 첫 해 읽은 책이 무려 66권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걷기를 좋아하는 뚜벅이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웬만한 거리만 걸어 다녀도 운동효과가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변화에 위축되어 있으면서 ‘걷기’도 잘하지 않게 되었다. 웬만한 약속도 나가지 않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게 무기력증이 아닐까, 싶게 나는 안으로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 순간 ‘한번 걷기’가 내 심장을 슬쩍 건드렸다. 그래, 매일 조금씩 걸어볼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여섯 시간을 쉼 없이 일하고 낮에는 달리기나 수영을 했고 저녁 9시에 잠이 들었다.’고 한다. 글을 쓰는 일이 불규칙한 작업일 수 있는데 하루키는 규칙적으로 매일 글을 쓰고 꾸준히 운동을 한 것이다.
특히 하루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지난 400년 간 가장 위대한 ‘창조자’로 꼽히는 인물들의 ‘하루 습관’ 중 1위에 오른 것은 ‘천천히 걷기’ ‘산책’이었다고 하지 않던가.
찰스 디킨스는 매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세 시간 동안 산책하며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했고 <실낙원>을 쓴 존 밀턴은 점심 식사 후 정원을 서너 시간 동안 산책했다고 한다. ‘산책에서 돌아온 디킨스는 에너지의 화신처럼’ 보였다고 한다.
나는 책을 쓰고 싶어 하지만 마음만 앞서지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백만 개쯤은 된다. 이 책의 저자는 ‘한번 걷기’가 준 힘을 느낀 후 매일 한 줄씩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권의 책을 내는 계기가 되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매일 ‘한 줄 쓰기’라면, 이것도 할 수 있겠다.
새해가 되면 다이어리를 사고 매월, 매주 그리고 매일 빼곡하게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을 적어놓는 나는 저자의 말대로 ‘실천’은 약하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또 다른 꿈을 꾸며 그 ‘계획’ 자체로 만족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습관의 재발견>을 쓴 스티븐 기즈도 ‘작은 것이라도 일단 하기’를 제안한다고 한다. 그것을 해냈다면 성공한 것이고 이런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더 큰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은 저자의 말대로 스티브 잡스의 ‘점’의 이론과도 연관이 있다. 현재의 무수한 많은 ‘점’들 나의 작은 행동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지금 당장 막막한 미래에 지금 할 일이 도움이 될까, 되지 않을까 망설여진다면 일단은 한번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 대목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마션>을 쓴 앤디 위어는 잘 나가는 프로그래머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의 꿈을 갖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작가와는 멀어지고 있던 그가 퇴근 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09년 <마션>을 블로그에 연재하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독자들이 늘어가며 결국 책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일화도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대작을 써야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블로그에 시간 날 때 좋아하는 글을 쓰는 작은 행동이 ‘씨앗’이 되었다는 것. 그 사실이 뭉클하게 와닿는다.
저자가 책을 쓰게 된 계기도 블로그에 ‘한 줄의 육아일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메모에 가까웠던 기록이 ‘책’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흔한 말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 구절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변화 앞에서 ‘나’는 쪼그라져있고 주눅 들어 있었다. 아프지만, 인정한다.
나는 지금 당장 일어나 잠깐이라도 걸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곧 긴 산책으로 이어지며 내게 누군가에게 그랬듯 ‘영감’의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또 오늘부터 블로그에든 컴퓨터 메모장에든 ‘한 줄 쓰기’를 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나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벌써 몇 해째 말로만 쓰고 있던 작품을 완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캄캄한 터널이 어쩌면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목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