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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an 18. 2021

비열한 사기꾼, 그리고 슬픈 딸


정 없다고 했지만 언제나 우는 쪽은 엄마였다. 우리의 대화가 왜 그렇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사건의 발단은 L과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엄마, L이 고향집에 와보고 싶다는데... 집에 데리고 오는 건 좀 그렇죠?"


은근슬쩍 떠 봤지만 엄마는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왜 내려온다는데?"


원래는 내가 L을 보러 가기로 한 거였다고 말했다. 작년부터, 보자 보자 내가 보러 갈게 말만 했는데 코로나도 겹치고 해서 못 가게 되었다고.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친구와 작년 말 통화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한테서 치이고 치여 너무 힘든 상황인 듯하여, 내가 언제든지 내려오라고 말했다고 말씀드렸다.


"친구한테 우리 집은 부모님이 계셔서 불편할 거라고 했는데~ 어른들 있어도 자기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요즘은 거꾸로 되더라. 그 친구는 안 불편할지 몰라도... 엄마가 불편하다, 이젠."


엄마가 이렇게 대놓고 '불편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난 놀랐다. 지난번에 친구가 우리 집에 마지막으로 놀러 왔을 때, 아침 손님상을 차려 내는 게 힘들다고 말씀하시긴 했다. 그래서 밥은 밖에서 사 먹을 거란 말을 더했지만,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더욱더 심각하게 피곤이 몰려온 듯해 보였다.


"근데 왜...... 항상 힘든 친구들만 널 찾는지 모르겠다."


아하. 조심스레 말씀하셨지만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으셨던 거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잖아요."


엄마의 본심을 알자, 나는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배부른 친구들이 왜 절 찾겠어요."


마치 상대방의 패를 간파한 비열한 사기꾼처럼.


"그러니까, 왜 그 모양인 친구들끼리 어울리냐는 말씀이시잖아요."


"......"


"제가 그 모양이니까 그렇죠."


기어이 그는 상대방이 제일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말을 내던지고 말았다. 엄마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신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차마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신다는 걸, 이 비열한 인간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어떤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직장을 그만뒀고, 나는 꽤나 그 친구의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함께 카페 창업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 친구가 고백하길, 나에게 "기대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내가 자기를 위해 카페를 열어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좀 놀랐다. 적어도 나는 그게 '동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초기 자금을 부담하는 건 맞지만, 그 친구가 카페에서 일하면서 인건비를 부담하는 것이라고 서로 이야기를 했는데ㅡ 그 친구에게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친구는 우리 고향집에도 놀러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친구가 왔을 때 '그런 걸' 느끼셨나 보다. 사소하지만 몇 가지 행동을 두고 엄마는 그 친구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고백하셨다. 정확히 말하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친구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흔히 얘기하는 '그런 친구랑 사귀지 마라고 얘기하는 깍쟁이 엄마'가 우리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결국 그 친구랑은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돼 버렸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급속도로 친해져서 수년을 연락하며 서로의 집을 오가는 사이가 됐는데도, 지금은 약속이나 한 듯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게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였다는 걸 알지만 그 친구도 그걸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친구를 평가하는 엄마가 싫었지만 또 말씀을 꽤 잘 실천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하는 말은 저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그래서 친구들을 그렇게 말하는 게 저한텐 너무... (치명적이에요.)"


"그럼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보여주는데, 그 친구들 평가도 못 하니?"


하긴. 집에 데려오고 엄마께 저녁밥, 아침손님상 차리게 하고 잠자고 아빠 차로 구경시켜 주고 가이드보다 더하게 엄마 아빠를 부려 먹었으면서 말 한마디도 못 하게 하다니. 여기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엄마, 너무 정 없어요."


그때 엄마는 상처 받으셨던 것이다.


"그건 아니지. 너는 감정이 너무 크고 그래서 사람들한테 쏟아붓는데, 사실 그 친구들은 널 그렇게 생각 안 해.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말란 말이야."


"그럼, 이걸 정 없다고 하지 정 있다고 해요?"


"너 지금 시비 거는 거니 지금?"




세상에 친구를 둘로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한 친구와 슬픈 친구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슬픈 친구의 예를 들자면, 백수인 친구, 이혼한 친구, 아픈 친구, 엄마 아빠가 돌아가신 친구, 빚이 있는 친구... 이상하게 내 주변엔 '슬픈 친구'가 많다.


행복한 친구는 대개 그런 이들이다. 직업 빵빵하고, 돈 잘 벌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잘하고, 내 기준에 제일 부러운 귀여운 아기들도 있고, 어디 호텔에 갔다 어느 와인을 마셨다 아기랑 같이 뭘 만들었다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이 화려하게 올라오는 그런 친구들. 나는 그런 친구들에게 괜히 기가 죽는다. 연락을 잘 안 하게 되는 건 물론이고 이젠 나와 친구라는 사실도 굳이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 엄마 말씀대로, 나는 '슬픈 친구'들이랑만 친구처럼 지내는 것 같다. 왜지?





 한 번은 빚이 있다던 친구가 마음에 걸려, 적금을 깨서 조금이라도 돈을 빌려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때 엄마랑 길을 가던 도중이었는데, 걸음을 딱 멈추고 말씀하셨다. "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돈을 빌려준다고 그래~!" 괜히 엄마한테 서운했다. 내 마음을, 내 돈인데, 왜 엄마가 뭐라고 하는지, 괜히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 친구는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도 한 적 없었기에, 결국 돈을 빌려주지도 않았지만, 그날은 엄마의 불안한 속을 박박 긁어놓는 날이 됐다.


엄마의 마음은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힘든 친구 도와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은 내가 생각할 정도로 '슬픈 친구'가 아니라는 거였다. 세상에 친구가 나밖에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꼭 나밖에 없는 것처럼,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 도와줄 것처럼 쓸데없이 책임감을 느낀다는 거였다.


내 주위의 친구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그런데 왜 내 주위에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친구들이 유독 많은 것 같지? 나는 왜 그들에게 항상 친절한 거지?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건, 나는 한편으로 좀 이기적이었다는 거다. 나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마음이 편하고, 그래서 내 마음 편하자고 '뭐라도 줄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다. 어쩌면 나는 우정을 빌미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행복한 친구에게는 내가 필요 없어도, 슬픈 친구에게는 내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밥 한 끼라도 사줄 수 있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해줄 수 있고, 기프티콘으로 뭐라도 보내줄 수 있고, 상 당했을 때 내려가 보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우정의 표시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우정을 베푸는 방식으로 연락을 하는 것 같다. 그 친구들이 고마워하는 걸 손사래 치면서, 나는 스스로 나는 그들에게 '어려울 때 옆에 있어주는' 그런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온전히 그 친구들을 위해서 그랬다고 장담하고 말하기 어렵다. 나는 내 도움이, 내 정성이, 선물이 가치있는 것이길 바랐던 걸 부인할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좋은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반성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친구들에게 그럼 나는 어떤 친구일까?


아마 슬픈 친구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슬픈 친구이기 때문에 내 주변엔 슬픈 친구들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험에 떨어지고, 직장도 그만두고, 휴대폰 번호도 바꾸고 잠적해서 연락을 받지 않는 아이. 이런 식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연락을 하지 않는 것도 있거니와, 다른 친구들도 굳이 연락을 하지 않는다. 저 너머 누군가의 슬픔이란 이젠 굳이 캐묻고 싶지도 않고 긁어 부스럼이 될 게 분명하니까.




"타이밍이 안 좋았어... 오늘, 엄마도 좀 그렇다, 마음이."


하필 오늘은 엄마에게 이유가 있던 날이었던 것 같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또 엄마 주변에 어느 누구가 좋은 데 시집을 갔다거나, 어느 누가 고시나 대학에 합격을 했다거나, 돈을 엄청 잘 번다거나... 그런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듣고 오셨던 게 분명했다. 며칠 전, 통화했을 때도 엄마 친구 딸이 왔는데, 너무 얼굴이 펴서 너무 예쁘다며 부러움이 잔뜩 섞인 얘기를 하신 터였다. 너무 예뻐지고 돈도 잘 벌고 커리어우먼이 됐는데, '우리 딸은......' 


엄마의 마음속에는 내 딸은 이렇게 안 예뻐지고, 멍청해지고, 돈이라곤 한 푼도 없고, 시집도 못 가고..... 그런 데도 다른 친구를 도와준답시고 오라고 하고 밥 사주고 돈 빌려줄 거라고 자꾸만 그러는 게 너무 한심해 보이는 거다.


"네가 다른 친구 도와줄 때가 아니잖아."


하지만 이 말씀을 하기 까지, 이런 말씀까진 하고 싶진 않았다는 게 뚝 뚝 묻어났다. 엄마는 그런 내 딸을 인정하기도 싫은 거다.


"어, 네가 지,금, 그럴 때,야....."


멀리서 엄마는 우셨다. 나는 뻔뻔하게 모른 척했다.


"알겠어요, 엄마. 다음 주에 친구 안 데리고 갈게요. 걱정 마세요. 끊을 게요."


황급히 끊어 버렸다. 다른 이들이 나의 슬픔을 묻지 않는 것처럼, 나도 엄마의 슬픔을 애써 캐묻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괜히 했다는 생각만, 후회만 할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슬픈 친구일 뿐만 아니라, 슬픈 딸일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는 유년 시절 그토록 자랑스러운 딸이었지만, 이젠 떠올리기만 해도 한숨이 가득한 그런 딸이 되어버렸다. 슬픈 엄마와 슬픈 딸. 엄마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던 사기꾼 같은 딸, 엄마에게 모진 말하는 언어 폭력배 같은 딸, 그럼에도 내 자식이라서 아프기만 한 '슬픈 딸'.




전화를 끊고 나서도 계속 마음에 걸려, 엄마께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다음날이 되고 말았다. 아침부터 울리는 핸드폰에 엄마의 번호가 뜰 때, 나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 봤는데, 집에 데리고 오는 거 괜찮을 거 같다. 마음대로 해."


결국 엄마께서 먼저 전화로 화해를 청하게 만들다니. 미안한 마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제 나도 엄마의 한계를 느꼈다. 그 한계를 알고도 모른 척할 순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


"아니에요. 엄마. 저도 진짜 괜찮아요. 앞으로 친구 안 데려올게요."


순순히 엄마가 수긍하시면서 결국 그렇게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덜 슬플 순 없었을까 기대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죄송하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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