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Dec 03. 2020

아직도 그날, 수능 친 하루


이미 십 년도 한참 더 된 기억이다.


오늘 누군가 수능을 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아이를 떠올렸다.


어린 날, 아무것도 모르고 수능을 쳤던 '그날의 나'란 아이를.




수능을 치기 전날에는 사약을 마신 것처럼 씁쓸한 마음을 안고 잠들었다.


드라마틱하게 밤이라도 새워야 할 것만 같았지만 그렇게 해서 벼락치기의 역전을 꿈꾸기엔 나는 간이 작았다.


평범하게 일찍 잠들기로 했다. 약간이나마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누일 때, 불안하면서도 후련했다.


마지막으로 보던 공책의 페이지를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그게 기억력 재생에 좋다는 말을 듣고 며칠 째 그런 시도를 하고 있었지만 번번이)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아침에는 부산스러운 부엌 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섯 시 반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깨어난 시각이. 생각했던 것보다 늦게 일어나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던 기억이 난다.


아무렇지 않게 아침을 먹으려고 애썼지만 정말이지 밥이 먹히지 않았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싸셨을 게 분명한 도시락을 받아 들면서 한편으론 죄송스러웠다.


아빠가 아끼고 아껴서 해주신 몇 마디 말씀을 들으면서 한편으론 울고 싶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발걸음은 떠나야 했다.


대통령을 경호하듯 엄마와 아빠는 나를 호위해서 추운 아침 날씨를 뚫고 차를 태워주셨다.


나는 차 안에서 공진단 반 알을 먹었다.


그게 유일한 부적이었다.




마여고. 내가 배정받은 고사장엔 벌써 온갖 차들과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일곱 시 반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학교에서 온 수능응원팀들은 보이지 않아 섭섭할 뻔했는데 누군가 발견해서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선배 언니를 발견했다고 그 순간 엄청 크게 응원의 말을 외치는 통에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아까 찾을 땐 언제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교실은 추웠다. 칠판에 써 붙인 커다란 자리배정 안내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미리 앉아있는 친구들 모두 옷을 몇 겹씩 껴입고 전장에 나온 병사처럼(마치 시안의 병마용처럼) 굳은 표정을 하고 앉아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뭔가를 톡톡히 기억할 수 있게끔 뭔가를 봐야 했지만, 뭘 봤는지도 모를 만큼 20~30분 되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내가 가져온 공책을 반도 못 봤을 때, 감독관이 들어오고, 그걸 집어넣어야 했다.  


나는 그때부터 평정심을 잃었던 것 같다.


안내 말씀은 길어졌고 나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1교시 언어영역


답안지를 배부받고, 언어영역 듣기 평가가 시작될 때까지도 이게 진짜 수능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했다.


첫 번째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서도 진짜라는 걸 실감할 수 없었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듣기 평가 문제를 살짝 놓쳐서 잘 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다.


온통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시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이게 바로 그 망한 느낌이라는 걸 몸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언어영역을 망쳤다.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와 울고 싶었던 마음이 터져 나왔고 결국 눈물이 찔끔 흘렀다.


'이래서 수능 시험날 자살을 한다는 뉴스가 나오는구나.'


(중정이 있는 학교였던 것 같은데, 유리창 너머로 어떤 화분을 보면서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자살할 만큼 간이 크지 못했다.


도망칠 용기조차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듯 그다음 시간을 위해 교실로 들어갔다.


그때처럼 끔찍한 느낌은 없을 것 같았다.


2교시 수리영역


감독관을 기다리면서 나는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미 망쳐버렸으므로, 또 망칠 것만 같았다. 심장이 너무너무 크게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낯익은 얼굴이 감독관으로 들어왔다.


윤리 선생님이었던가? 지금은 어느 과목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하여튼 우리 학교 선생님이셨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 놀라서 인사를 하고 말았다. 물론 고개만 까닥인 것이다.


마치 모르는 문제들 속에서 아는 문제를 하나 발견한 것처럼, 너무 반가웠다.


그 선생님은 딱히 내가 좋아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사실 너무 깐깐해서 싫어했던 선생님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부처님 같고 얼마나 어른처럼 보였는지, 안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부유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참 재미있지. 난 그 선생님 아니었으면 시험을 제대로 칠 수 없었을 거다.


정말 덕분에 2교시 시험을 제정신으로 칠 수 있었다.


아까는 언제 그랬냐는 듯, 1번부터 모든 문제가 날개 돋친 듯 내 연필 끝에서 술술 풀려나갔다.


그날은 손에 꼽을 만큼 수리영역을 잘 쳤던 날이었다.


점심시간


언제나같이 점심 도시락은 미지근하게 따뜻했다.


어젯밤 안방 문은 닫혀 있었지만 엄마는 내가 잠들 때까지 잠들지 못하신 게 분명했다.


호두 반찬만 기억난다. 그 외 장조림이 있었나? 반찬이 아주 작게 작게 먹기 좋게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소화 잘 돼라고... 기억력에 좋다고...


마지막으로 디저트로 선물 받은 초콜릿 두 개가 있는 걸 보고 문득 뭉클해졌다.


아까 남은 공진단 반 알도 먹었다.


3교시 외국어 영역


더는 요행을 바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교시는 그렇게 끔찍했는데 2교시는 그럭저럭 잘 쳤다는 생각에 나는 또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영어는 내가 가장 자신이 없던 과목이었다.


약간 포기한 마음이었나 보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시험을 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영어 지문을 읽는 나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중간쯤 가다가 도무지 읽고 또 읽는 모습을 발견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확 부아가 나서 시험지를 확 넘겨버렸다. 그리곤 맨 뒤에서부터 풀기 시작했다.


망한 느낌이 치밀어 오르는 걸 꾹꾹 눌러 참았다.


그래도 시계를 힐끔힐끔 보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이 모자라진 않았다는 거다.


망하긴 망했지만 스스로 아닌 척할 수 있었다.


4교시 사회탐구 영역


부쩍 몇 명이 시험을 치지 않고 고사장을 떠나 버렸던 게 기억난다.


물론 사회탐구영역이 필요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사실 완벽한 수능 점수가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이미 수시 2학기에 붙어있는 상태였으므로, 수능 몇 과목만 최소 등급을 유지하면 됐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몇 과목 몇 등급이 필요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수시와 상관없이 수능을 열심히 쳤다.


미련한 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


적어도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미리 포기하진 말자는 생각은 그나마 내 인생을 버텨온 단 하나의 신조였다.


시험을 치는 도중에 나는 절대로 시험시간을 끝까지 다 채우지 않고 먼저 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사회탐구를 쳤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잘 치지 못했다.


국사는 완전히 난장판이었고 그나마 세계지리를 잘 쳤나?


나머지 과목은 뭘 쳤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


정말 사탐이야말로 평소 모의고사 때처럼 편안하게 시험을 쳤고 또 원래 받았던 그저 그런 점수를 받았다.


5교시 제2외국어 영역


시험장에 제2외국어를 치기 위해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한 반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부쩍 어둑어둑해진 창밖 풍경과 함께 이제 정말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치는 과목은 한문이었다.


어떤 과목도 이 과목처럼 '만점'에 욕심낸 적은 없었다.


그때 전교에서 제2외국어로 한문을 공부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문 선생님은 야자시간에 틈틈이 나를 불러 한문 수업을 해 주셨다.


당시에는 그게 특혜라고 생각해보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특혜였다.


왜 한문을 한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그냥 단순히 일본어는 하기 싫고 한문 선생님이 좋아서였다.


철이 없는 나 같은 학생을 두고 한문 선생님은 참 고생하셨지.


3학년 담임 선생님 성함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한문을 가르쳐주셨던 '김윤원' 선생님 성함은 기억할 수 있다.


선생님은 내가 한문에서 만점을 받으면 '사서삼경'을 사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내가 한문에서 만점을 받았더라면 정말 해피엔딩이었겠지만, 결코 그런 행복한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기어이 한 문제를 틀리고 말았다.


내가 수능에서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것이  이 한 문제였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ㅡ 라며 스스로 자신감이 뚝 떨어진 건 바로 여기서 이 지점에서였을 거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해 스스로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아쉬운 마음을 울컥 삼키고 대학에 올라가서 사서삼경을 공부하겠다고 약속드렸다.


물론 사서를 사서 열심히 읽었지만 그것마저도 삼경은 다 읽지 못했다.


보란 듯이 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었지만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


엄마가 데리러 오셨는지 안 오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데리러 오셨던 것 같기도 하고.


아 맞다. 데리러 오셨구나.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저 멀리 엄마 얼굴을 발견하고... 왜 오셨냐고 마음속으로 괜히 타박했던 게 기억난다.


사실 너무 반가웠으면서... 그렇게 반가웠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는 수능 끝나고 나서 놀러 간다는데, 누구누구는 그렇게 후련하고 날아갈 듯 기쁘다던데.


나는 하루 종일 이어진 오늘 이 시험이란 거대한 사건의 후유증으로 수능이 끝났다는 사실도 실감할 수 없었다.


'진짜' 끝났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면서 또다시 아까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방 안에 들어가서 시험지를 채점했다.


떨렸다.


이 사 삼 삼 오


이 사 삼 삼 일(/)


사 오 일 이 사


사 오 이(/) 이 사


다섯 문제 단위로 답안과 시험지를 비교해보며 틀린 문제를 가차 없이 슬래시 표시로 표시해 나갔다.


가다가 턱 막히는 틀린 문제가 있을 때는 가슴이 철렁 했다.


다시 한번 정답이 정말 그게 맞는지 확인했지만 그게 맞을 땐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맨 앞장 과목 옆에 틀린문제 개수를 '마이너스 몇 점' 이렇게 적었다.


틀린 문제보다 맞은 문제가 월등히 많았다.


그래도 다행이란 느낌보다 틀린 문제가 꽤 많아서 불안한 느낌이 훨씬 더 많았다.


마지막으로 뼈아프게 한 개를 틀린 한문 과목을 포함해서, 모든 시험지의 채점이 끝났다.


생각보다 잘 친 것도 아니었지만 못 친 것도 아니었다.


한 과목도 만점이 없다는 건 좀 아쉬웠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이 모든 걸 끝냈다는 게...


정말...


끝이구나.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수능 점수


며칠 전 어떤 연예뉴스를 보면서 송중기가 수능에서 380점대를 맞았다고 하더라.


문득 내 성적은 몇 점인데...라고 생각하려다 보니, 그러고 보니,


내가 몇 점을 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나 때에는 송중기와 다르게 400점 만점이 아니라 500점 만점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몇 점이었지?


갑자기 십몇 년 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수능 성적표를 찾아보게 됐다.


검색하니 확인할 순 있게 돼 있더라.


그런데 막상 받아 든 점수가 총점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표준점수뿐이었다.


게다가 등급 표시가 나를 뼈아프게 했다.


1등급을 받은 게 몇 과목 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렇게 불안불안하게 끝낸 언어영역이 채점해보니 한 갠가 두 갠가 틀려서 무척 다행스러웠는데, 알고보니 역대급으로 문제가 쉬워서 등급으로는 2등급이었다.


외국어3등급이었고.


표준점수에서 원점수를 환산하는 계산식까지 검색지만, 그 당시 과목별 평균이나 표준 편자를 알 수 없었으므로 모든 과목의 원점수를 알기란 불가능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수능시험에서 몇 점을 받았는지 모른다.





뒤늦게 과거 성적표를 받아 들고 좀 놀라웠던 건,


지금까지 수능을 잘 쳤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시 보면, 사실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성적.


나와 똑같은 점수를 받은 아이가 (비록 그 친구도 이미 수시에 합격한 거였지만) 고대 경영학과를 들어갔다.


그런데 나는 그걸 보고 내가 수능으로 들어갔으면 고대쯤은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나 스스로 기억을 조작했던 걸까?



나는 재수를 생각해 보지도 못했지만


어차피 갈 대학은 정해져 있었고 수능은 그럭저럭 치면 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수능을 너무 잘 쳐서 수시를 합격한 대학에 들어가기에 아깝다면, 재수를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소 내 실력에 걸맞는 점수를 받았고 그만한 수준의 대학이라 만족했다.


사실 재수는... 거의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 당시 우리 학교 전교 1등이었던 아이가 수능을 나보다 못 쳐서 재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그 친구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재수를 해서 이듬해 서울대 법대를 들어갔다.


역시 실수는 실수고, 본래 실력은 본래 실력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냈다는 게 참으로 멋졌다.


반면에 나는 재수를 치기엔 배포가 크지 못했다.


만약 재수를 해서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내가 포기한 대학을 생각하며 걷잡을 수 없이 후회했을 것이다.


재수를 안 한 건 잘한 선택이지만 한편으론, 아쉽고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어느새 난 단기 레이스형 사람이 되고 말았던 거다.


주변에 재수를 했던 사람들이 몇 있는데, 모두 내가 존경스러워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어떤 한 고비를 스스로 넘겨본 사람들이었다.


멀리 보고 천천히 준비하는 절차탁마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해내고 말았다.


그들은 훗날 더 큰 시험에서 빛을 발했다.


예를 들면 고시와 같은.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한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얼마 전 어떤 친구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난, 법대를 간 것이라고 말했지.


즉, 법대를 가지 않았어야 한단 말이다.


수시를 붙어버려 어쩔 수 없었다면,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능동적인 선택이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즉 재수를 하는 선택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법대를 들어가 버렸고.


그때부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나를 지배하는 생각의 단초가 되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여기 왔으니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가야 할 것이라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어쩔 수 없음에 반기를 들게 되었고, 나는 뒤늦게 모든 순간에서 반기를 드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만약 그때 재수를 해서 1년 동안 내가 진짜 가고 싶었던 곳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단단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그런 부질없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만약 재수를 고민한다면, 고민할 수 있다면


이 땅에 모든 수능 치는 친구들이 갑자기 대견스럽다.


지금은 시험을 치르고 있을, 곧이어 터벅터벅 시험장을 나오는 옹기종기 그 발걸음들이 눈앞에 선하다.


구역질 날 정도로 몇 년이란 시간 동안 준비한 것을 오늘 하루를 위해 쏟아내느라 다리에 힘이 다 풀렸을 텐데, 그 시간을 버텨내고 이렇게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수고했다.


그리고 만약 시험을 못 친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재수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감히 재수를 하지 않은 나의 경험을 빌어 그건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포기가 아니라 그건 탈환이라고,


오히려 너를 더 단단하게 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재수를 고민하지도 못했지만 너는 고민할 수조차 있다는 건, 실력을 탈환할 충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가지 않은 길을 돌이켜보면서 나는 참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주변에 재수사람들을 보면서


그러고보면 주변에 욕심 있는 사람들은 다 재수를 선택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중에 재수한 친구들은 물론이고, 삼수한 사촌오빠, 반수한 친구, 두 사촌동생 모두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모두 간절히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며 그 꿈을 이룬 걸 보면서 괜히 재수를 하지 않은 내가 부끄러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분명한 건, 그들은 원래 실력에 못 미치는 수능 결과를 받았고 재수를 함으로써 본래 실력을 재확인했을 뿐이란 거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렇게 잘 치지 못한 수능 시험이었지만 내 분수에 맞는 결과였다.


재수를 한다면, 그건 욕심을 부리는 것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 욕심을 부리느냐 마느냐는 내 평생을 좌우하게 되었고 나의 성정을 만들어냈다.


나는 분수를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또한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수능은 그것으로 이미 정해져버린 결과가 아니다.


어쩌면 수능 이후로 재수를 하느냐 마느냐를 기점으로 비로소 온전한 '본인의 선택'이라는 걸 시작하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면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나요?


당신도 언젠가 먼 훗날 그런 질문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 답을 고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ㅡ 나 말고 다른 이들은 모두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ㅡ 바란다.


단 하루가 십수 년이 더 지나도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나기란... 그날이 수능 시험날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직도 맴도는 그날 하루의 추억은 이토록 진하다.


아름답고도 추하다 말할 수 있는 저무는 하루의 노을, 저무는 한해,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내가 비로소 사라지고 결코 아름답지 않은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지금의 내 모습으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객관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하기엔 뭣 하지만 그순간 나에겐 최선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날의 나에게ㅡ


잘 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부모님께 참으로 감사하고 죄송하다. 그날 말없이 지켜보느라 애쓰셨지만 나보다 더 마음을 졸이던 유일한 분들이었기에.

감사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매거진의 이전글 밥을 사게 해서 미안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